사진보다 남는 게 있는, 에펠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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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랜드마크, 에펠탑
파리의 도심 속, 푸릇푸릇한 잔디밭의 따뜻함과 무쇠의 차가운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곳, 어디가 떠오르세요? 프랑스 파리의 상징, 에펠탑(La tour eiffel)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나 그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landmark)가 있을 텐데요. 랜드마크는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에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이죠. 하지만 우리는 종종 외관의 아름다움을 담는데 취해, 그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펠탑을 배경으로 ‘인생샷’을 찍지만, 에펠탑이 어떻게 파리의 상징으로 우뚝 서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에펠탑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간과한 채 말이죠.
에펠탑은 1889년, 구스타브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 1832-1923)이라는 프랑스 건축가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높이 324m의 이 건축물은 250만 개가 넘는 리벳으로 고정하고, 1만 8000개의 금속부품을 사용해 만든 거대 구조물이었습니다. 이 웅장한 철재 구조물이 뿜어내는 아우라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에펠탑을 사랑하는데요. 하지만 처음부터 모두가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완공 당시에는 오히려 ‘흉측하다’는 평가를 받았었죠. 소설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은 에펠탑 1층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고 하죠. 에펠탑에 안 보이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했다는데요. 에밀졸라(Emile Zola),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등도 에펠탑을 ‘파리의 흉물’, ‘철사 다리로 만든 깡마른 피라미드’ 라고 비하하기도 했어요.

에펠탑의 탄생, 만국박람회
에펠탑이 모두의 미움을 샀던 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그 배경은 19세기 전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쇠붙이 기계와 기술의 탄생을 촉발시켜 바야흐로, ‘철의 전성기’가 시작되었죠. 이러한 흐름 속에서 1851년, 영국에서 최초의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는데요. 이후 ‘만국 박람회’는 점차 유럽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한 경쟁의 장으로 활용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 다양한 실험적 건축물들을 일회성으로 건축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런던의 ‘수정궁(The Crystal Palace)’과 파리의 ‘에펠탑’은 대표적인 경쟁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에펠탑과 구스타브 에펠
1889년, 프랑스는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300미터의 철탑 설계안을 공모했고, 이때 채택된 것이 ‘구스타브 에펠’이 설계한 철탑이었어요. 힘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으니 평범함으로는 승부수를 띄울 수 없었겠죠. 더 크게, 더 특이하게. 목적에는 합당했겠지만, 이것이 바로 문제가 되었어요. 탑이 당시 건축물들에 비해 높아도 너무 높았던 것이죠. 당시 파리 시민들은 ‘거대하고 흉측한 철탑’이 고풍스러운 파리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버릴 것이라며 에펠탑의 건립을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완공 이후 에펠탑이 40년간 파리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당시 그 거대한 이 그들에게 얼마나 이질적이고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을지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시민들은 강대국 간의 힘겨루기에 편승하기보다는 ‘파리다운 파리’를 잃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던 것이겠죠.
반면, 이 거대한 철재 구조물은 계획대로 완공되기에 이릅니다. 위아래가 바뀐 ‘Y’의 실루엣을 갖추기까지, 구스타브 에펠의 공헌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그는 이미 수많은 철교를 건설했었고, ‘자유의 여신상(1885)’의 철골구조를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했죠. 구스타브 에펠의 이런 다양한 경험은, 에펠탑을 성공적으로 건축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건축물의 최대 높이는 무게에 의해 결정됐는데요. 철을 사용하면서부터는 강철 메카노 구조 덕분에 더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높은 건축물의 최대 적은 ‘바람’이죠. 때문에 에펠탑은 안정성을 위해,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로 만들어졌어요. 이것이 오늘날에도 사용하는 ‘에펠탑 풍동장치의 원리’랍니다. 뿐만 아니라, 구스타브 에펠은 공사비가 모자라자 사비까지 털어 완공하는데 힘을 쏟았죠. 탑은 그의 이름을 따, ‘에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에펠탑의 위기
새로운 시도였던 만큼, 여러 건축가들의 부단한 연구와 노력 끝에 완공된 에펠탑이었는데요. 하지만 이후로도 또 다른 위기를 맞게 됩니다. 첫 번째 위기는 설치 20년 후에 찾아왔습니다. 애초에 만국박람회 전시용으로 건축되어 20년만 유지하기로 한 계획 때문이었죠. 태생적으로 시한부 인생이었던 셈인데요. 하지만 막대한 철거 비용에 시민들의 반대까지 더해져 이 위기를 넘기게 됩니다. 20년간 에펠탑이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파리의 랜드마크로 당당히 자리 잡았던 모양입니다. 그 무렵 발명된 전화의 안테나 탑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도움이 되었다고 해요.
다음 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찾아왔습니다. 1940년, 독일은 파리를 점령했고,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에펠탑에 나치 깃발을 꽂으려 했습니다. 승강기 고장의 문제로 꼭대기에 걸리지는 못했지만, 찢어진 나치의 깃발이 잠시 에펠탑에 꽂히고 말았죠. 4년 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해 연합군이 파리로 진격해왔을 때입니다. 위기에 몰린 히틀러는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에게 에펠탑을 비롯, 파리의 주요 건축물인 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대성당, 콩코르드 광장을 폭파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현명했던 ‘디트리히 폰 콜티츠’는 이 위대한 걸작들을 무너트려 인류의 죄인이 될 수 없었어요. 그는 파리를 보존했고, 대신 히틀러의 배신자가 되는 쪽을 택했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독일 패전 후 2년 만에 가석방되었습니다. 에펠탑에게 찾아온 두 번의 아찔했던 위기는, 이렇게 그 가치를 알아본 이들의 기지로 무사히 넘어가게 되었답니다.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완공되기 전부터 시민들의 거센 반대를 감내해야 했고, 완공 후에도 쉽게 파리의 일부가 될 수 없었죠. 하지만 시민들은 ‘새로운’ 에펠탑의 가치에 눈을 떴고, 그 거대한 탑을 해체 위기로부터 지켜내었던 숨은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뚝 솟아 그 무게를 견뎌낸, 에펠탑은 이제 찬란한 132살 생일을 맞이했어요. 에펠탑은 단단하면서도 우아한 그 외형만으로도 충분히 미학적 가치가 있지만, 132년이라는 세월을 어떻게 견뎌 왔는지 에펠탑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 보시길 바랍니다. 누군가 ‘사진밖에 남는 게 없다’고 했던가요. ‘인생샷’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을, 랜드마크의 역사적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참고자료
- 에티엔 귀용 외 3명. 미래의창. 『이토록 아름다운 물리학이라니』, 서울: 미래의창 출판사, 2021.
- 이상미, 인물과사상사. 『건축은 어떻게 전쟁을 기억하는가』, 서울: 인물과사상 출판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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