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나오는 집? ‘딜쿠샤’라고 불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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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백 년 전 옛날,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 서울의 한 언덕에는 붉은 벽돌로 쌓인 서양식 2층 저택이 있었어요. 이름하여 딜쿠샤(Dilkusha),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었죠. 이 저택에는 앨버트와 메리 부부가 살았는데요~”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요? 딜쿠샤는 동화 속이 아닌 실재하는 집이에요. 앨버트는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연합통신(Associated Press, AP) 통신원이기도 해서 이 집 속에 간직한 이야기가 더 가치 있게 느껴지는데요.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딜쿠샤가 복원되어 올해 3월 1일, 첫 공개되었어요. 동화 속에 등장할 것 같은 집 딜쿠샤와, 그 주인공 같은 메리와 앨버트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같이 딜쿠샤 탐방을 떠나 볼까요?
👩❤️👨테일러 부부의 로맨스부터

미국인 앨버트 W.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1948)는 광산기술자였던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1897년 조선에 입국했어요. 그는 한국에서 광산 사업과 ‘테일러 상회’를 경영했죠. 동시에 연합통신의 통신원으로도 활동하였으니, 무려 쓰리 잡에 종사하는 멀티 플레이어였네요. 훗날 그의 아내가 된 메리 L.테일러(Mary Linley Taylor, 1889~1982)는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유명 연극배우였어요. 동양 순회공연을 위해 일본 요코하마에 들렸던 메리는 일본 출장 중인 앨버트를 파티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말죠. 앨버트는 메리에게 ‘호박 목걸이’를 건네며 사랑을 고백했고, 인도로 떠나는 메리에게 자신이 꼭 찾아가겠다고 약속해요. 그로부터 열 달 후 인도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1917년 6월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돼요. 그리고 함께 한국에서 달콤한 신혼생활을 시작했죠.
🏡기쁜 마음의 궁전 탄생
앨버트와 메리 부부는 어느 날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산책하다가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 매력적인 언덕을 발견했어요. 은행나무에 마음을 뺏긴 메리는 이곳에 집을 짓고 싶다고 말했고, 앨버트는 그 땅에 메리를 위한 집을 지었어요. 그리고 집에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였죠. 딜쿠샤는 메리와 앨버트가 신혼여행 중 인도에서 방문했던 궁전의 이름이었는데, 언젠가 집이 생긴다면 그 이름을 붙이겠다고 결심했었거든요. 그렇게 은행나무 한 그루만 있던 언덕 위에 테일러 부부의 터전인 ‘기쁜 마음의 궁전’이 탄생했어요. 1923년에 착공하여 1924년 완공된 딜쿠샤. 하지만 처음 딜쿠샤가 건축될 당시, 마을 주민들은 딜쿠샤를 반대하며 항의를 했고 무당은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는 데요. 신성하게 여기던 은행나무 터에 낯선 서양식 주택이 들어서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거죠. 그 저주가 통한 걸까요? 1926년 딜쿠샤는 벼락을 맞아 불에 타버리고 말았어요. 이후 딜쿠샤는 1930년 재건되었고 1942년까지 앨버트와 메리는 쭉 이곳에 거주했어요.
👶독립선언서 위에서 태어난 브루스 테일러
1919년 2월 28일,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Bruce Taylor, 1919~2015)는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어요. 아내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병원을 찾은 앨버트는 우연히 아기 침대 속에 감춰져있던 종이 뭉치를 발견했는데요. 이 종이는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들이 조선총독부의 눈을 피해 외국인들이 있는 병실에 숨겨둔, ‘독립선언서’의 사본이었죠. 한국어에 능했던 앨버트는 이것이 독립선언서라는 걸 알아보고 3․1운동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여 동생 윌리엄에게 전달했어요. 윌리엄은 기사와 독립선언서를 구두 뒤축에 숨겨 도쿄로 가서 미국에 전신을 보냈고요. 앨버트가 작성한 기사는 1919년 3월 13일자 뉴욕타임스에 보도되며, 3․1운동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죠. 이외에도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을 보도하기도 했어요.
이로 인해 그는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을 했고, 메리는 가택구금을 당하기도 했어요. 1942년 결국 일제의 눈엣가시였던 테일러 가족은 강제 추방을 당하고 말아요. 해방 이후 앨버트는 다시 딜쿠샤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1948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어요. 메리는 그해 9월, ‘한국에서 묻히고 싶다’는 앨버트의 유언에 따라 서울 마포구 양화진의 외국인 묘역에 그를 안치했는데요. 앨버트는 그토록 원하던 한국으로 주검이 되어서야 돌아오게 된 거죠.
✈딜쿠샤로의 귀환
그동안 까마득히 잊혔던 딜쿠샤는 2005년 앨버트 부부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어린 시절에 살던 딜쿠샤를 찾아 나서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어요. 브루스의 의뢰를 받은 서일대 김익상 교수는 일제강점기 지명만으로 딜쿠샤를 찾는 데 약 2개월이 걸렸는데요. 2006년, 브루스는 66년 만에 딜쿠샤에 방문하게 되죠. 당시 딜쿠샤는 집이 없는 주민들의 안식처였고, 15가구 26명 정도의 사람들이 무단점유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어요. 딜쿠샤의 원형은 많이 훼손되어, 주민들은 딜쿠샤를 '귀신 나오는 집'으로 부를 정도였다는데요. 상상이 가시나요?
브루스가 세상을 떠난 후 2016년, 브루스 테일러의 딸인 제니퍼 테일러(Jenifer Taylor, 1958~)는 한국을 방문하여, 조부모의 유품과 딜쿠샤 거주 당시의 소장픔 1,026점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어요. 서울시는 딜쿠샤의 원형을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2017년 8월 딜쿠샤를 등록문화제 제687호로 등록해요. 2018년 7월에는 딜쿠샤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이주를 완료했죠. 2018년 11월 복원 공사를 시작한 딜쿠샤는 2020년 12월 드디어 완공되었어요. 복원 공사 후, 남겨진 사진을 근거로 고증을 진행한 뒤 당시의 모습을 완벽에 가깝게 재현했어요.
🏠다시 만난 딜쿠샤
딜쿠샤는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세워 내부에는 목조 마루를 깔고, 상부에는 목조트러스를 받친 경사지붕을 올린 총면적 623.78㎡(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로 건축되었어요. 벽체는 ‘공동벽 쌓기’라는 독특한 건축으로 건설되었는데요. 서양식 건축기법으로 지어진 집이지만, 국내 환경을 고려하여 건축된 집으로, 1920~30년대 국내 서양식 집의 건축기법과 생활양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예요. 인왕산을 배경으로 남향으로 지어진 집, 여름철 더위에 대비하기 위해 거실에는 넓은 창문과 베란다를 배치했고, 겨울철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각 층에 여러 개의 벽난로를 설치했죠.

딜쿠샤의 내부 1,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거주하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했고요. 나머지 공간은 테일러 가족의 한국에서의 생활상, 앨버트의 통신원 활동 등 6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딜쿠샤의 1층에 들어서면 대칭을 이루는 안정감 있는 거실이 눈을 사로잡아요. 이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지인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던 공간이에요. 뒤쪽 벽에 넓고 깊게 파인 부분이 보이시나요? 이를 '잉글누크'라고 부르는데요. 잉글누크를 만들어 벽난로를 설치하고, 어두워 보이는 집을 환하게 밝히기 위해 황금빛이 도는 노란색 페인트를 칠한 것이 특징이죠.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1층과 동일한 구조의 거실을 볼 수 있는데요. 메리는 2층 응접실을 '딜쿠샤의 심장부’로 불렀어요. 테일러 부부가 가장 아끼는 물건들이 배치되어 곳이고, 이곳에서 부부는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즐겼죠. 부부가 아끼던 고려청자와, 자수로 된 열 폭의 병풍을 재현해둔 것을 볼 수 있어요.

연극배우였던 메리는 그림 솜씨도 매우 뛰어났어요. 전시실에서는 메리가 직접 그림 작품들도 만날 수 있어요. 금강산 여행을 통해 아름다운 금강산의 모습을 그린 그림, 테일러 가족을 도와 일했던 공서방과 김주사의 초상화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외국인이 그렸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국적인 정서가 잘 녹아있죠. 김주사(본명 김상언)는 고종 때 역관이었으며, 테일러 상회와 광산 운영에 깊이 관여한 인물인데요. 그는 독립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테일러 부부가 추방당한 이후 종로경찰서에 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어요.
💬Editor's Comment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만 있던 언덕에 가장 먼저 세워진 서양식 집, 그 안에는 지난 백년의 세월과 무수한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있는 듯합니다. 테일러 부부가 처음 그 집을 발견하고 반한 순간부터, 벼락 맞아 불타버린 날, 친구들과 파티를 즐기는 테일러 가족, 한국에서 추방당하던 때, 그 집을 차지해서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데요. 단지 백 년 전 어느 외국인 부르주아 가족이 살던 집을 넘어, 집 한 채에 우리의 역사와 당시의 삶까지 모두 담겨있는 소중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떠세요? 이제 딜쿠샤에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셨나요?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이야기였을 수도 있지만, 딜쿠샤를 방문하는 모두에게 기쁜 마음이 샘솟기를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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