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해방...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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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미적지근한 저녁을 웃고 울게 하는 건 뭘까요? 한 편의 잘 만들어진 드라마가 아닐까 해요! 드라마라는 예술은 날이 갈수록 장르도, 연출 방식도, 다루는 메시지도 확장되고 있어요. 오늘날의 드라마는 인간 내면에 대한 통찰이 담긴 대사,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감정을 몰입하게 만드는 OST, 그를 뒷받침하는 적절한 연출까지, 사실상 완연한 종합예술에 가까운데요.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달 말 종영한 후 많은 이들에게 긴 여운을 남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해요. 드라마 속 인물이 해방에 다가가는 방식, 이와 연결되는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 1800~1890)의 철학, 그리고 숨겨진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45)의 회화작품을 짚어보며 드라마 속 예술이 확장되는 모습도 살펴볼게요!

 

🔑인생에 던지는 중요한 질문

염씨 삼남매 ©JTBC

  여기, 지겨운 일상에 몸부림치는 삼 남매가 있어요. 서울에서 왕복 세 시간에 이르는 경기도 산포시(가명)에서 나고 자란 삼 남매. 태어난 곳도, 회사도, 사랑도 이들에게는 상처를 줄 뿐이에요. 소리 없이 곪아가지만 누굴 탓할 수도 없습니다. 이들이 상처받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이들의 인생이니까요. 삼 남매의 문제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요? 서울에 집이 없고, 차가 없고, 정규직이 아니라서? 이들은 고립감, 갇힌 기분,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기분에 시달리고, 마음 한편에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요. 그런 나날 속, 주인공 ‘미정’은 지금껏 살아오며 끊임없이 마주한 질문에 집중해요.

“ 어려서 교회 다닐 때, 기도제목 적어 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 관계.. 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이런 물음, 해본 적 있으세요? 미정의 질문은 실존1) 그 자체입니다. 사실 실존에 대한 의문은 우리가 늘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것에 가려져 명확하게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두려움이나 질투, 증오와 같은 감정에 꽁꽁 감춰진 경우도 있고요. “왜 사는가?”처럼 우리를 종종 찾아오는 감상에 젖어만 있기에는 당장 끝내야 할 업무, 공부, 일들이 너무나 많으니까요. 그런데 이 드라마의 주인공, 미정은 자기의 실존에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어떤 브레이크도 없어요.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모든 질문을 잠재워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며, ‘인생은 이런 거야’라는 어떤 거짓말에 합의하지 않을 거라면서요.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우리의 일상과는 달리 실존적 물음을 둘러싼 복잡한 불순물이 모두 사라져요. ‘염미정’이라는 살아 숨 쉬는 캐릭터는 분명한 언어로 우리 인생의 불편한 사실들을 낱낱이 꺼내어 보여줍니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자기 존재의 고독과 인생의 모순으로 다가가죠. 또한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죽음’이라는 소재가 자주 등장하는데요. 등장인물의 죽음은 인간 생의 끝을 상기시켜요. 죽음을 생각할 때에야 우리는 생을 진정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죠. 이 드라마, 철저히 실존을 파고드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1) 실존 : 실존 철학에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적으로 물으며 존재하는 주체적인 상태를 뜻해요.

 

💖사랑 대신 추앙을 말하는 이유

  실존이라는 질문에 부딪히며 깨닫게 된 고독함. 미정은 자신의 ‘버려진 느낌’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해요. 그의 질문의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드라마의 특별함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요. 그는 실존적 물음의 끝에서 그동안 익숙하게 느꼈던 회의가 아닌, 사랑이라는 답에 도달하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듯한 일상을 보내던 미정은 아버지의 일을 돕는 것 외에는 하루 종일 술만 마시는 옆집 남자 ‘구씨’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미정’과 ‘구씨’ ©헤럴드경제

 

  조금 이상하죠? 그는 사랑이 아닌 추앙을 하라 말해요. ‘추앙’이라는 생소한 단어의 선택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화제가 된 것이기도 한데요. 추앙이란 무엇이고, 왜 하는 걸까요? 미정이 말하는 추앙은 전적으로 응원하는 것.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것. 오늘날 ‘내가 이걸 줬으니 너도 이걸 줘’- 하는 등가교환의 관계로 변질된 사랑 대신, 재지 않고 일단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기로 선택하고 응원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어요. 사랑받을 만한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모습이든 사랑하겠다고 선택하는 것이죠. 이와 같은 관계는 독일의 사회심리학자이자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그의 저작 『사랑의 기술』에서 이야기한 진정한 사랑의 모습과 가까워요. 프롬 역시 그의 저서를 통해 사랑을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이야기하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라고 했는데요. 내가 만약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를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자신의 삶 또한 사랑하게 된다고 말하죠. <나의 해방일지> 역시 그토록 치열하게 실존을 향해 질문하던 미정이 추앙이라는 자기만의 답을 얻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내는 과정을 담아냈어요.

 

🎨<나의 해방일지> 속 해방 예술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구씨의 일터와 집에서 자주 등장한 그림이 있어요.
 

구씨가 술을 마시는 장면 등장하는 그림 ©Drama Voyage
빈 술병이 가득한 구씨의 집, 걸려있는 유사한 그림 ©JTBC Drama


  그리고 아래 그림이 바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예술가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1956)의 작품들이고요. 어떤가요? 그림만 클로즈업한 장면은 따로 없어 완전히 동일한 작품(의 사본)인지 식별하기는 어렵지만, 한눈에 보아도 매우 유사합니다. 

 

<no.1, 라벤더 안개(1949)> ©한겨레
<no.30, 가을의 리듬(1930)> ©한겨레

 

  왜 잭슨 폴록의 작품이 <나의 해방일지>에서 등장했을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잠시 잭슨 폴록에 대한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잭슨 폴록은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과거에는 미술사가 유럽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현대미술 화가들과 동등하게 인정받았던 최초의 미국 화가 중 한 명인데요. 그는 자신의 고향을 여행하던 중 한 멕시코의 벽화 화가가 페인트를 붓고 떨어뜨리는 것을 보며, 새로운 예술적 기법을 창안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법은 ‘액션 페인팅 (드리핑 기법)’이라 불리게 되죠. 이젤 위에 캔버스를 올려두고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캔버스를 바닥에 두고 그 위에 물감을 흩뿌리는 기법이에요. 때문에 상하좌우의 구분이 없는 올오버(all-over)페인팅이죠.

 

액션페인팅을 선보이는 잭슨 폴록의 모습 ©브리태니커

  잭슨 폴록은 이전에 없었던 파격적인 추상 회화를 통해 20세기 미술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작업에 대한 부담감이 매우 컸다고 해요. 후기에는 스스로의 작업방식에 권태를 느끼고 다시 표현주의로 돌아오기도 했고요. 심적 부담감이 컸기 때문인지 폴록은 알코올 의존증과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았고, 심지어 44세에는 음주운전으로 사망했다는 비화가 있습니다. 사실, <나의 해방일지>의 구씨 역시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이동 중인 차 안에서도 언제나 술을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요. 이렇듯 구씨가 술과 함께였던 순간은 유독 잭슨 폴록의 그림이 함께하곤 했습니다. 구씨의 이러한 알코올 의존증적 모습은 비슷한 증상으로 고생한 폴록의 이야기와 그림을 통해 더욱 강렬하게 표현되는 것만 같아요.

  그러나 드라마에서 폴록의 그림이 등장한 것이 알코올 의존증이라는 공통점 때문인 것과는 별개로, 그의 작품과 <나의 해방일지>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닮은 부분이 분명 존재합니다. 폴록의 작품은 캔버스를 이젤에서 해방시키고, 현대미술을 전통과 구조, 모더니즘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해방’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요. 폴록은 액션페인팅을 통해 작품이 완성된 이미지보다는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곤 했어요. 이는 완전히 해방된 모습보다는 각자가 가진 힘겨움의 원인을 짚어나가며 해방을 시작하는 데에 의미를 두었던 <나의 해방일지> 속 인물들과도 결을 같이 하죠. 

  드라마의 주인공 ‘미정’의 이름은 언니인 ‘기정’과는 달리 정해지지 않고 확실성이 결여된 상태를 뜻하기도 하는데요. 계속해서 인생에 질문을 던지는 미정의 모습은 그의 이름처럼 모든 게 불확실한 인생을 보여주죠. 불확실성은 잭슨 폴록 작품의 특징이기도 해요. 던져진 물감이 캔버스에 표현될 모습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한편으로 폴록은 우연을 부정한다고 했어요. 물감의 색과 물감을 던지는 방향은 본인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어요. 그런가 하면 작품에서 프랙탈2)의 조화와 규칙이 발견되기도 해 예술인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그의 작품은 우연과 의지가 뒤섞인 것이죠. 폴록은 그림이란 그것만의 독자적인 운명을 갖지만, 최종 작품은 예술적인 의지에 좌우된다고 생각했는데요. <나의 해방일지> 역시 ‘의미와 의도가 있는 인생’과 ‘아무 의도도 방향도 없이 흩뿌려진 인생’ 사이에서 성장해가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인생이 마치 잭슨 폴록의 그림 같다고 볼 수도 있겠어요. 

2) 프랙탈은 전체의 일부가 되는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를 뜻해요. 자기 유사성이라고도 하죠.

 

💬Editor's Comment

  <나의 해방일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해방을 꿈꿔요.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내 템포대로” 가기,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지지자를 잃었다는 “약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슬퍼야 할 때조차 웃음밖에 지을 수 없는 “표정”에서 해방되기, 매일 찾아오는 “죄책감”의 다양한 얼굴을 환대하기-까지. 이들은 <나의 해방일지>를 쓰며 힘겨움의 원인을 짚어나가고, 하루에 몇 초씩의 설레는 순간을 쌓아 올리며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디뎌요. <나의 해방일지> 속 인물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니, 어쩌면 해방이라는 것은 사실 나의 실존을 견디게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던져진 존재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나의 존재가 나에게 의미 있어지고 스스로의 인생을 환대할 수 있게 되는 일 말이에요. 예술의 역할은 혹시 그런 게 아닐까요? 우리로 하여금 돈, 돈- 하는 것에서 벗어나 조금 다른 자유를 찾게 하는 것 말이에요. 결과적으로 ‘돈이 최고야’ 하게 만드는 예술, 문학이라면 정말이지 최악이 아닐까요. 반면 “그래, 인생에는 다른 중요한 게 있지.”라며 시선을 돌리도록 하는 것. 예술의 역할은 어쩌면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추구하기 어려웠던 해방에 다가가기 위한 것은 아닐지 감히 생각해봅니다. 마치 <나의 해방일지>가 수많은 욕망 중 ‘실존’을 뚫고 들어가 우리의 내면과 만나게 된 것처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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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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