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우리가 도끼를 휘두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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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약간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리지 보든 도끼로 엄마한테 마흔 번, 아빠한텐 아니야 마흔 하고 한번 더”
생각하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이 가사는 뮤지컬 <리지>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문장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몇 배는 더 소름 돋고 전율이 흐르는 사실이 있는데요. 바로 이 끔찍한 가사가 실제 미국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죠. 어찌나 유명한지, 미국 아이들이 줄넘기를 하며 종종 부르기까지 한다니까요. 1892년 8월 4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미국 전체를 떠들썩하게 한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해요. 부유하고 명망 높은 집안의 사업가 앤드류 보든과 그의 아내 애비 보든이 도끼로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던 거죠. 놀랍게도 당시 용의자로 체포된 것은 그들의 둘째 딸 리지였어요. 과연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무엇이 보든 가(家)를 핏빛으로 물들였을까요?
👩👩👧👧네 명의 여성들이 돌아왔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리지 보든 역할에는 전성민, 유리아, 이소정 배우가 캐스팅되었어요. 이어서 리지의 언니 엠마 보든 역할에는 김려원, 여은 배우가, 리지와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 앨리스 러셀 역할에는 제이민, 김수연, 유연정 배우가, 보든가의 가정부 브리짓 설리번 역할에는 이영미, 최현선 배우가 캐스팅되었고요. 어, 그런데 혹시 눈치채셨나요? 뮤지컬 <리지>는 오직 여성 배우들로만 구성되어 있어요. 오늘날 존재하는 수많은 뮤지컬 중, 여성 배우들의 에너지만으로 무대를 채우는 작품은 많지 않은데요. 무대 위의 네 여성 배우들이 우리에게 전해줄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리지 보든 사건의 배경은 19세기 후반, 때는 여성들에게 자유가 전혀 부여되지 않았던 시기죠. 자유보다는 순종과 독실함이 강요되던 때였고요.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리지라는 인물은 오히려 참신함을 부여받게 됩니다. 부모를 도끼로 내리쳐 죽인 엽기적인 살인. 그런데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바로 가녀리고 나약한 존재로 여겨졌던 여성이라니!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법한 사건에 곧 리지 보든 사건은 일파만파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죠.
하지만 리지 보든 사건이 이후 영화로, 뮤지컬로, 드라마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각색되고 이야기되는 것은 단순히 이 독특한 캐릭터성 때문만이 아니에요. 뮤지컬 <리지>는 네 여성 배우를 통해 인물 사이의 유대와 지지를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이웃사촌 앨리스는 리지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고, 리지의 언니 엠마, 보든 가의 가정부 브리짓은 법정에 선 리지 곁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함께 맞서죠. 조금씩 젠더 프리 캐스팅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이지만, 여전히 무대 위 여성의 설 자리는 부족하던 차에 <리지>는 그 누구보다도 통쾌하게 목소리를 냅니다. 네 명의 여성 배우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이야기들을 전할 수 있겠어요?
🎤이것은 뮤지컬인가 록 콘서트인가
뮤지컬 <리지> 속 배우들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강렬한 음악을 통해서예요. 살인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뮤지컬이니만큼, 음악 역시 압도적일 수밖에 없죠. 무대 위의 4인조 여성 배우, 그리고 무대 뒤의 6인조 라이브 밴드가 선사하는 격렬한 록 사운드가 관객들의 심장을 뛰게 해요. 리지가 자유를 꿈꿀 때, 그의 결심이 살인이라는 행동으로 옮겨질 때, 온몸으로 그를 둘러싼 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의 간절함과 불안정함이 담긴 듯한 음악이 함께 하죠.
인물이 처한 상황을 음악에 담아내는 방법은 거친 록 사운드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리지>는 송스루(Song Through) 뮤지컬인데요. 송스루 뮤지컬은 공연 중 나타나는 모든 대사들이 노래로 진행되는 뮤지컬 장르로, 뮤지컬계의 명작이라 여겨지는 <캣츠>, <레 미제라블> 역시 송스루 뮤지컬이죠. 때문에 폭력, 살인, 그리고 사랑을 둘러싼 복잡한 감정들은 대사 하나하나마다 음정으로 더욱 생생히 살아납니다. 그저 말로 전하는 대사와는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이거 같은 공연 맞아?
사실 저는, <리지>에 인터미션 15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의아했어요. 러닝타임이 짧은 대부분의 중소극장 뮤지컬에는 대부분 인터미션이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2막이 시작하는 순간,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답니다. 배우들이 1막과는 180도 다른 의상을 입고 등장하기 때문이죠.
1막에서 도끼를 휘두른 리지, 그리고 이에 동조한 엠마와 브리짓. 이 세 인물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등장해요. 1막의 답답하고 치렁치렁한 드레스와는 다른, 현대적 올블랙 탑과 바지로요. 단정하게 묶고 있던 머리도 풀어헤쳐, 화려한 색의 머리가 드러나기까지 하죠. 하지만 아직 앨리스는 드레스로 스스로를 꽁꽁 싸매고 있는데요. 자신이 본 ‘진실’만을 이야기하겠다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앨리스는 왜인지 모르게 리지에게 불리한 증언들을 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판사가 그녀와 리지와의 관계를 추궁하자, 순진하던 눈빛은 돌변합니다. 사실 이 둘은 친구 그 이상의 관계였거든요. 하지만 당시 시대상은 두 여성의 사이를 절대 이해하지도, 이해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죠. 결국 판사와 배심원들 앞에서 리지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리지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 앨리스 역시, 마지막 순간에는 드레스를 벗고 변신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2막에서의 의상은 단단함, 자유와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게 해요. 자신들을 억압하던 금기를 깨고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함을 보여주죠. 그것이 사회적 억압이 되었든, 사랑에 대한 억압이 되었든, 성별에 대한 억압이 되었든 말이에요.
✅솔직 핵심 정리 노트
❗ 폭력, 욕설, 피, 살인 등 자극적인 소재들이 등장합니다. 트리거를 갖고 계신 분들은 관람에 주의해 주세요.
ㅇ박수갈채드립니다
- 넘버 맛집이에요. 짜릿한 화음, 미친 고음, 이에 더해지는 밴드 사운드와 강렬한 조명까지.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쾌감으로, n년 동안 응어리진 스트레스가 모두 날아가는 기분이에요.
- 진짜 록 콘서트에 온 듯한 커튼콜. 앵콜 매들리로 이루어지는데, 주요 가사가 어렵지 않아서 공연을 처음 본 날에도 커튼콜 떼창이 가능해요. 커튼콜이 시작되자마자 모두가 벌떡 일어서서 뛰기 시작하는데요. 칼 박수, 점프, 그리고 떼창으로 하이라이트 넘버 메들리를 신나게 즐겨보아요!
ㅇ요건 쫌 아쉬운데
- 스토리가 아주 단순해요. 빌드업 있는 탄탄한 서사, 감동적인 서사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아쉬울 수 있어요.
- 강렬한 록 음악으로 구성된 송스루 뮤지컬이다 보니, 가사가 한 번에 와닿지는 않아요. 이것은 혹시, 가사집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쇼노트의 큰 그림?
- 실제 ‘리지 보든 사건’은 미제 사건으로 남아,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뮤지컬 <리지>에서는 리지 보든을 범인으로 확정 지은 채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죠. 관객들이 범인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더 스릴 넘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Editor’s Comment
리지가 살인을 행한 이유는 단편적으로 보자면 친부의 폭력과 억압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었을 거라 생각해요. 남성들을 위한 신성한 성별인 리지가 감히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겠냐고 비꼬는 브리짓, 리지와의 관계를 추궁하기 바쁜 판사를 뒤로한 채 리지의 편에 서는 앨리스.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이들로 하여금 도끼를 휘두를 동기를 충분히 제공해 주었다고 생각해요. 모든 무대가 끝난 후, 네 배우는 무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요. 그리고는 씩 웃으며, 들고 있던 피 묻은 도끼의 손잡이를 돌려 관객에게 내밀죠. 마치 손잡이를 잡으라고 하는 것처럼요. 이젠… 우리가 세상을 향해 도끼를 휘두를 차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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