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알듯 말듯 묘한 감동의 맛! <안나, 차이코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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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이 클래식 음악을 찾는 때는 언제일지 궁금해요. 저는 주로 강렬한 집중의 순간이 필요할 때 클래식 음악을 찾곤 한답니다. 가사와 같은 언어적 표현이 드러나지 않아서일까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집중을 위해 클래식 음악을 찾는 까닭에는 평온한 음률을 따라 마음마저도 잔잔해진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유려하고 차분한 선율만이 집중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통통 튀는 귀여운 맛의 음악도, 강렬하고 제 멋대로 들쭉날쭉한 음악도 외부 상황과 나 사이 단단한 담벼락을 지어 몰입에 도움을 주는 걸요. 그렇다면 역으로도 한번 생각해봅시다. 많은 이들에게 열중의 시간을 선물하는 이 음악, 하나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사람은 어떻게 집중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인지 말이죠.

 

✨뮤지컬로 되살아난 차이코프스키의 삶

  뮤지컬 <안나, 차이코프스키>는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따라 작품 활동을 이어간 예술가들을 조명합니다. 제목에서부터 눈에 확 들어오는 이름이 있죠.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라는 인물입니다. 뮤지컬 <안나, 차이코프스키>는 제작사인 과수원뮤지컬컴퍼니의 시리즈 작품 중 하나인데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삶과 음악을 팩션 뮤지컬로 담아낸 <루드윅: 베토벤 더 피아노> 이후 두 번째로 선보이는 작곡가 시리즈랍니다. 이번에도 역시 차이코프스키라는 작곡가를 주제로 그의 삶과 음악을 작품으로 풀어냈죠.

  삶과 음악이 작품 안에 녹아있다니, 이쯤에서 의문이 생기는데요! 우리는 차이코프스키 일생의 한 조각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극과 음악이 결합된 뮤지컬이라는 작품의 형태를 생각해보면,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해요. 그의 삶은 허구와 실제가 적절히 배치된 팩션으로, 음악은 배우와 관객의 몰입을 돕는 넘버로 드러나죠.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차이코프스키의 대표작,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오네긴> 속 우리 귀에도 익숙한 멜로디를 차용했거든요. 이 반가운 멜로디에 배우들의 폭발적인 가창력과 시적인 표현이 담긴 아름다운 가사가 더해져 극 중 인물의 감정을 더욱 풍성하게 증폭시킵니다.

 

<안나, 차이코프스키> 속 차이코프스키를 연기한 배우 에녹 ©하루예술

 

💥클래식 매력 최대 출력!

   이외에도 우리의 시선과 귀를 사로잡는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무대 한가운데 놓인 피아노인데요. 이 피아노는 그저 웅장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무대를 한층 더 생생하게 만들기 위한 장식이 아니에요. 극이 진행되는 동안 배우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을 선보이거든요. 녹음되어 항상 동일하게 반복되는 음악과 달리, 그때그때 미묘하게 달라지는 배우들의 연기를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이번 작품이 특별한 이유가 하나 더 있어요. 바로 대학로에서는 최초로 9인조의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었다는 점입니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의 특징 중 하나는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악기의 특색이 두드러진다는 점인데,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죠. 평소 미디어에서 흔히 접하는 오케스트라 인원에 비하면 다소 적게 느껴질 수 있지만, 현장에서 라이브로 연주되는 음악을 듣는 순간 그 생각은 싹 날아갈 거예요. 마치 음악회 혹은 무도회장에 자리하고 있는 듯한 입체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음악을 선물해주니까요. 

 

무대 중앙에 놓인 피아노 ©하루예술

 

🙄그냥 사랑 이야기 아니에요.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시작!

   뮤지컬 <안나, 차이코프스키> 속 등장하는 3가지의 작품들 중에서도 전반적인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단연 <오네긴>입니다. 보다 익숙한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에 비해 <오네긴>은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이라고 해도 초면이신 분들이 많을 텐데요. 조금은 낯선 이 작품이 <안나, 차이코프스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우리는 <오네긴>이 담고 있는 이야기, 그리고 차이코프스키가 <오네긴>을 작곡하게 된 배경을 들여다봐야 해요.

  <오네긴>은 러시아의 대문호 중 한 명인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1837)이 19세기 초에 완성한 운문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원작으로 한 3막 구성의 오페라예요. 주인공 오네긴은 맑고 순수한 시골 여인 타치아나의 진실한 사랑을 저버리고 허랑방탕한 세월을 보내는데요. 시간이 흐른 뒤 러시아의 이곳저곳을 방랑하고 돌아온 그는 사교계의 여왕이 된 타치아나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진중하게 고백한 그는 타치아나에게 거절당한 뒤 영원한 이별을 고하며 다시 방랑의 길 위에 오르게 되죠. 이처럼 단순한 줄거리만 두고 보면 ‘이게 끝이야…?’ 싶어요. 뭐 이런 시시콜콜한 연애담을 장장 5,500행에 이르는 운문 소설로, 또 무려 3시간에 이르는 오페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결말마저 허무맹랑한 이 작품이 19세기 당시에는 상당히 파격적인 축에 속했다면 믿으시겠어요?

 

타치아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오네긴 ©Metropolitan Opera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라는 친숙한 구절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푸시킨은 러시아 최초의 본격 리얼리즘 소설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활동하던 19세기는 최악의 전제정치로 인해 정서적으로 황폐한 시기였어요. 사회와 개인의 마음이 각박하면 흔히 신화와 같은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를 찾기 마련입니다만, 푸시킨은 현실과 가장 맞닿아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조금 다른 행보를 보였습니다. 동시에 당시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로 인해 러시아의 민족주의 사상이 한껏 고무되어 있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푸시킨은 민족과 자유, 사랑을 내세우며 러시아의 문학, 나아가 문화적 수준을 높이 끌어올리는 데에 일조했습니다. 차이코프스키 역시 동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듯이 푸시킨의 리얼리즘 사상에 깊이 매료되었고, <오네긴>을 통해 거대한 드라마보다는 인물 내면에 있는 심리묘사에 힘쓰고자 했어요.

 

푸시킨의 민족, 자유, 사랑 정신을 칭송하는 넘버 ‘푸시킨 동상 앞에서’ ©하루예술

 

🔥이거 내 이야기 아니야? 작품으로 승화시킨 사랑의 열병

  이쯤에서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안나, 차이코프스키> 속 <오네긴>이 중요한 이유 말이에요. 앞서 차이코프스키가 <오네긴>을 통해 주인공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일에 집중했다고 했죠? <안나, 차이코프스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상상력을 불어넣습니다. 극 중 차이코프스키는 주인공 오네긴과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닮아있음을 부정하고, 인식하고, 끝내 인정하고 직면하는 과정을 거쳐요. 자신의 사랑이 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한 적 없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그럼에도 현재에는 닿을 수 없는 사랑을 바라보는 감정. <안나, 차이코프스키>는 그 애달픔과 절망, 극복의 과정을 예술로 승화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죠. 이러한 과정은 그와 예술적으로 교류하던 안나에게도 똑같이 찾아옵니다. (안나에 대한 소개가 늦었네요!) 세상과 잠시 멀어지기 위해 외딴 수도원을 찾은 차이코프스키는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안나를 만나는데요. 각자 예술과 자유를 외치며 가까워졌던 그들은 예술과 전쟁이 공존하던 시기에 대한 혼란스러움,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한 아픔마저도 함께 나누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줍니다.

 

수도원에서 만난 안나와 차이코프스키 ©하루예술

 

  안나와 차이코프스키의 관계는 오늘날 우리에게 다소 멀리 떨어진 시대의 예술가를 다시금 조명해야 하는 이유를 전해줍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며 늘 외로움과 소외를 느껴야만 했던 차이코프스키. 그에게 음악은 이러한 결핍을 해소하는 창구가 되어주었는데요. 이에 더해 안나라는 인물을 통해 변화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한 세기를 훌쩍 넘은 과거의 인물이지만, 그가 자신의 결핍을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과정은 많은 이들에게 언젠가 다시금 떠올릴 법한 깨달음, 그리고 공감을 불러올 테니까요. 또 누구에게나 차이코프스키와 비슷하게 어딘가 결여된 부분이 존재하고, 이를 딛고 나아가야 하는 순간 역시 찾아오니까 말이죠.

 

<안나, 차이코프스키> 속 차이코프스키를 연기한 배우 박규원 ©하루예술
<안나, 차이코프스키> 속 세자르를 연기한 배우 테이 ©하루예술

 

💬Editor's Comment

  차이코프스키와 예술관에 있어 대척점을 이루고 있던 세자르 역을 맡은 테이는 황두수 연출이 이야기한 ‘평양냉면 같은 극’에 이런 말을 덧붙였어요.

“누군가의 입맛에는 맞지 않을 수 있지만 한 번 맛 들리면 훅 빠져들게 되는 것 같다. 평양냉면은 밋밋한 맛이 매력인데 그 맛을 만들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극적인 요소들을 배제하고 나서도 마음속에 남는 것들이 많은 작품인데, 이 점을 심도 깊게 봐주신다면 좋을 것 같다.”

  <오네긴>을 세상으로 내어놓은 푸시킨과 차이코프스키가 그러했듯이, <안나, 차이코프스키> 역시 인물이 그 자신과 주고받는 끊임없는 대화, 그리고 인물이 겪는 변화에 섬세하게 집중하며 알듯말 듯 묘한 맛을 만들어냅니다. 그 인고의 과정에 집중하고 함께 하는 이들은 그 맛에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평양냉면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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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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