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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그림을 들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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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성과 상상력의 미묘한 차이를 아시나요? 국어사전에 따르면 창의성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특성’, 상상력은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보는 힘’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두 단어는 새로운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그 의미가 비슷해 보이기도 해요. 이렇게 서로 닮은 듯 다른 두 단어 ‘상상력’과 ‘창의성’을 십분 발휘해 친구의 그림을 노래로 변신시킨 작곡가가 있는데요. 러시아의 국민악파 작곡가, 무소르그스키와 그의 작품 <전람회의 그림>을 함께 들여다볼까요?

 

🎶음악으로 남게 된 친구의 그림

무소르그스키의 초상화 ©82cook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 1839~1881)는 러시아의 작곡가로, 국민악파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국민악파란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에 걸쳐 러시아, 보헤미아, 북유럽 등지에서 국민적ㆍ민족적 특색을 살리기 위해 그들 고유의 리듬과 가락을 넣어 곡을 만든 갈래인데요. 이렇듯 무소르그스키는 ‘러시아 5인조’라 불리는 러시아의 민족주의 작곡가들 중 한 명으로써 러시아 음악의 고유한 색채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의 영향력은 러시아를 벗어나 각국의 민족주의 음악과 프랑스의 인상주의에까지 미치게 되었답니다. 

  무소르그스키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음악에 재능을 보였지만,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는데요. 작곡도 처음에는 거의 취미 수준으로 했고, 그나마 받은 음악 교육이라고는 성인이 된 후 배운 것이 거의 전부였어요.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초보 음악전공자들도 익히는 기초적인 음악적 문법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는 모습을 다수 찾아볼 수 있어요. 얼핏 보면 아마추어가 만든 조잡한 곡으로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하지만 오히려 이런 문제점들이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의 가치를 높여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답니다. 그의 작품들은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기에 빛을 발할 수 있었던 창의성과 상상력의 산물이지요.

   무소르그스키의 창의성이 특히나 잘 드러나있는 곡을 꼽는다면 <전람회의 그림>은 빼놓을 수 없는데요. 곡 제목이 독특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나요? <전람회의 그림>은 제목에서부터 곡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는 전형적인 ‘묘사음악’이에요. 묘사음악은 말 그대로 악기의 소리로써 무언가를 묘사하는 음악인데요. 무소르그스키는 이 곡을 통해 ‘전람회의 그림’을, 정확히 말하면 10개의 회화 작품을 10곡의 음악으로 묘사해냈답니다.

 

빅토르 하르트만

  <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르그스키의 가까운 친구였던 빅토르 하르트만(Victor Alexandrovich Hartmann, 1834~1873)의 유작을 표현해낸 작품이에요. 하르트만의 추모전에서 약 400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전시회에 다녀온 무소르그스키가 그중 그림 열 점을 음악으로 옮겨놓은 것이지요. 다섯 살 많은 친구였던 하르트만은 무소르그스키와 만난 지 오래된 친구는 아니었지만, 꽤 절친한 사이였나 봅니다. 친구의 부고를 전해 들은 무소르그스키는 그 안타까운 마음을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개나 말, 쥐들도 살아있는데’라는 유명한 대사를 인용하여 “아,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개나 말, 쥐들도 살아 있는데 하르트만이 죽다니!”라고 토로하기도 했다니까요. 게다가 친구를 애정 하는 만큼 그의 작품을 또 다른 장르로 표현한 점을 미루어 보면 그들의 우정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알 수 있죠. 

 

👣발걸음까지 그려낸 음악

  무소르그스키는 ‘친구의 그림을 들을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상상에서 시작하여 전람회의 그림을 작곡했어요. 우리가 눈으로 보는 그림을 귀로 듣는 음악으로 표현한다니 놀라운 발상이지요? 그런데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아요? 이와 비슷한 예로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있잖아요. 앞서 말한 원작을 따로 둔 작품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유기적인 작품인데요. 하지만 대부분 상상을 시각화한 것에 그치는 반면, 무소르그스키는 시각적인 것을 청각화한 것이라는 차이가 있어요. 쉽게 말해, 작품을 감상할 때 필요한 감각을 완전히 다른 감각으로 탈바꿈시킨 것이지요. 시각의 청각화, 회화의 음악화를 무소르그스키는 전람회의 그림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느낀 감정이나 사건을 표현한 것에서 더 나아가, 전혀 다른 감각으로 느끼는 작품을 음악화했다는 것은 그만의 독특함이라 할 수 있어요.

  ‘시각의 청각화’라는 이 곡의 특징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특징이 도 하나 있는데요. 무소르그스키는 ‘전람회의 그림’ 자체를 음악으로 표현한 만큼 곡과 곡 사이에 간주의 성격을 갖는 ‘프롬나드’를 넣었어요. ‘프롬나드’는 천천히 걷는 걸음걸이를 뜻하는데, 전람회에서 한 그림을 감상하고 다음 그림으로 걸어가는 것을 프롬나드라는 또 하나의 작은 곡, 간주로써 나타낸 것이죠. 걸음걸이가 항상 똑같은 빠르기를 유지하지 않듯, 프롬나드 역시 일정하지 않아요. 이 프롬나드들은 10개의 그림곡 사이사이에 배치되어 입체적 공간감을 만들어낸답니다.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이지 않나요? 그림을 곡으로 만들어낸 것도 모자라 관람객의 발걸음까지 곡으로 묘사하다니요. 이런 디테일이 모여 ‘전람회의 그림’을 듣는 대중들이 실제로 전람회에 있는 것처럼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죠. 

  작곡가의 상상으로 시작한 작품이 역으로 청자를 상상하게 만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흥미로운 지점인데요. 아마 무소르그스키가 전문적으로 음악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빛을 발할 수 있었던 능력이지 않을까 합니다. 소위 말하는 ‘틀’이 없기에 더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이겠죠. 전문적으로 배운 음악가들에 비해 ‘투박하지만 독특함’을 장점으로 삼은 작곡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람회의 그림>

  <전람회의 그림>은 총 10곡으로 이뤄진 피아노 모음곡으로, 전체 연주 시간은 약 35분이에요. 전시를 보는 것과 비슷한 시간이 걸리니 곡과 함께 원작이 되는 하르트만의 그림들을 함께 감상해보는 것도 좋겠어요. 각 곡들은 아름다움과 서정성, 단호함과 장엄함, 우울함 또는 엄숙함, 리드미컬함 등 다양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요. 원작 그림 역시 비슷한 느낌을 전해주지만, 그림을 본 후의 무소르그스키의 감정도 반영했기 때문이지요. 

빅토르 하르트만, <키예프의 대문>

  <전람회의 그림> 중 최근 많은 이들의 화두에 오른 작품이 있는데요. 마지막으로 연주되는 10번째 곡 <키예프의 대문(The Heroes’ Gate at Kiev)>입니다. 키예프는 우크라이나의 수도로, 2022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발발 이후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로 ‘키예프의 대문’ 영상이 다수 업로드되고 있어요. <키예프의 대문>은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현 시국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요. 그림 <키예프의 대문>은 당시 키예프 시 도심에 건설될 예정이었던 웅장한 문의 모습을 하르트만이 상상해서 작품으로 남긴 것인데요. 러시아식의 둥근 지붕과 뾰족한 첨탑, 말을 타고 성 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병사들의 모습을 무소르그스키는 음악으로 표현해 러시아적 선율미와 당당한 기백을 드러냈답니다.
 

💬Editor’s Comment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는 무소르그스키와 그의 상상력을 한껏 담은 곡들은 우리에게 오히려 단점처럼 느껴진 것들을 장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상상에는 제한이 없는 만큼,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누구나 생각해낼 수 있다는 것 또한 다시 되짚어보게끔 하고요. 여러분도 <전람회의 그림>과 함께 마음껏 상상력을 펼쳐보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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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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