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계의 혁명가, 혹은 최악의 고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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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발레라고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백조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의상, 발레리나의 굳은살 투성이 발, 입이 떡 벌어지는 회전 동작 등이 떠오르죠. 그렇다면 혹시 발레리노는 어떤가요? 여기, 꼭 알아야 할 천재 발레리노가 있거든요! 바로 바츨라프 니진스키(Ва́цлав Фоми́ч Нижи́нский, 1890-1950), 발레리나에 비해 덜 돋보이는 남자 무용수의 가능성을 끌어올린 전설적인 발레리노인데요. 심지어 그에게 헌정하는 발레 작품까지 나왔을 정도라니까요! 전설이었던 한 무용수의 삶, 과연 마지막 순간까지 행복했을까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고자 했던 소년!
폴란드 출신 무용수 부모에게서 태어난 니진스키(Vaslav Nijinsky, 1890~1950)는 걸음마와 동시에 춤을 배웠어요. 두 살 아래 여동생은 탁월한 무용수 겸 안무가인 니진스카이고요. 무용 금수저의 냄새가 난다고요? 안타깝게도 니진스키의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어요. 니진스키의 형은 추락사고로 뇌를 다쳐 평생 정신병원 신세를 졌고, 바람둥이 아버지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버리고 도망쳤답니다. 남겨진 가족은 궁핍함 속에서 하루하루 생존하듯 살아야 했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데다 성격도 내성적이었던 탓에 니진스키의 학교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어요. 그러나 예체능 과목만은 예외였죠. 그는 학생 시절부터 춤에 관해서는 천재로 불렸어요. 니진스키는 출중한 실력 덕에 9살에 황실 발레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요.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생계를 위해 서커스를 하던 그의 어머니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죠. 그의 비상한 춤 실력은 입학하자마자 교사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빠르게 소문났어요. 12살 때는 이미 ‘신동’으로 러시아 전역에 알려졌으며, ‘세계 8대 불가사의’로 칭송받기까지 했답니다. 그리고 18살, 마린스키 극장 공연에서 주연을 맡아 무용수로서 큰 성장을 이루는데요. 이때 만난 사람이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됩니다.

✨니진스키의 인생을 바꾼 한 사람!
당시 러시아의 황족이었던 류보프 왕자는 니진스키라는 사람과 그의 춤에 깊이 매료되었어요. 그는 후원자를 자처했고, 니진스키 가족의 재정 문제까지 해결해주었답니다. 오직 춤밖에 몰랐던 니진스키는 왕자 덕분에 러시아 귀족 사교계에 들어서게 되는데요.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사람을 만나요. 그는 바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 1872~1929)! 20세기 초 유럽 예술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이름이죠. 예술 비평가이자 기획자였던 그는 <예술세계>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러시아 예술 사조를 뒤흔들었어요. 1909년에는 러시아 무용수로 꾸려진 발레단 ‘발레 뤼스’를 창단하여 서유럽을 휩쓸었고요. 디아길레프가 창단한 발레 뤼스는 간판 무용수가 입었던 옷이 경매에서 고가로 낙찰될 정도로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누린 발레단이었답니다.


류보프 왕자의 소개로 디아길레프를 만난 니진스키는 이번에도 춤으로 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발레 뤼스’에 합류하게 되죠. 둘은 고용, 피고용인 관계를 넘어서 애인 관계가 돼요. 사실 동성애자였던 디아길레프와 달리 니진스키는 이성애자였지만 디아길레프의 절대권력을 거절하긴 어려웠습니다. 그 투자 덕분에 자신의 재능과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떤 안무’ 때문에 디아길레프와 의견 충돌이 점점 잦아졌어요. 언제나 본인의 발레단을 1순위로 생각하는 디아길레프에게 분노와 실망도 쌓여갔고요. 결국 니진스키는 동료 무용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인 동료 단원과 즉흥적으로 결혼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디아길레프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게 되죠.
이 결혼은 그의 인생을 또 한 번 바꿔놓았는데요. 이제 좀 살 만한가 싶었던 니진스키의 생활을 내리막길로 몰았죠. 그의 아내는 지배욕이 강했어요. 니진스키가 발레단에서 수년간 너무 낮은 임금을 받았다며 디아길레프를 고소하도록 했고, 남편을 앞세워 발레단 창단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춤과 관련된 것 외엔 무능했던 니진스키에게 이 모든 일들은 너무나 역부족이었어요. 니진스키는 계속해서 재기를 꿈꿨지만, 디아길레프는 사사건건 그의 홀로서기를 방해했고, 1차 세계대전까지 발발하면서 다시는 춤을 출 수 없을 거란 불안감이 니진스키를 짓눌렀죠. 니진스키는 점점 우울에 빠져들었어요.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훨훨 날아봤기에 내리막으로 치닫는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거죠. 그러다 20대 후반에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고, 보호시설과 정신병원을 오가며 살았습니다. 게다가 그의 장인, 장모가 그의 아내 몰래 니진스키를 요양원에 강제 입원시킴으로써 니진스키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어요. 결국 마지막까지 불안과 우울 속에서 허우적대다 눈을 감게 됩니다.
이 모든 비극은 앞서 언급했던 ‘어떤 안무’ 때문에 시작되었는데요. 도대체 어떤 안무였길래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무너지게 했던 걸까요? 천재 무용수의 인생을 한순간에 바꾼 안무 이야기, 지금부터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최고의 무용수가 최악의 안무가로
니진스키는 최고의 무용수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안무에도 욕심이 있었어요. 틀에 박힌 발레의 움직임에 반발하며 발레 안무 개혁을 추구했죠. 1912년에 처음 선보인 <목신의 오후>는 너무나 급진적인 나머지 당시 관객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답니다. 당시 주류였던 고전발레는 창조적 자유보다는 명료성, 조화, 대칭 및 질서와 같은 형식적 가치에 중점을 둔 안무를 선호했거든요. 오직 상류층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눈부시고 화려한 분위기가 중심이었던 거죠. 이와 달리 <목신의 오후>는 굉장히 외설적이었어요. 관객뿐만 아니라 단원들에게도 발레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죠. 게다가 목신 판으로 분장한 그가 무대에서 스카프로 자위하는 듯한 마임을 하는 바람에 큰 외설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니진스키는 <목신의 오후>로 일으킨 소란이 가라앉기도 전인 1913년 <봄의 제전>을 선보입니다. 이번엔 무용수로도 참여하지 않고 오직 안무가로서 자신의 이상을 드러내려 했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이 던진 충격은 <목신의 오후> 그 이상이었어요.
<봄의 제전>은 봄맞이 제사의식을 다룬 작품으로, 알몸에 가까운 이교도 무리가 신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원시 종교를 다룬 이 작품에서 무용수들은 춤이라기보다는 몸부림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였고, 원초적인 욕망, 충동, 무질서가 무대 위를 가득 채웠어요. 격렬하고 에너지 넘치는 작품이었지만,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관객들은 온 힘을 다해 야유를 퍼부었어요. 발레는 아름다운 것이라는 관념이 굳건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아름다움은커녕 불편한 감정을 끄집어내는 봄의 제전은 아마 재앙과도 같았을 거예요. 폭동을 일으킬 것처럼 흥분한 관중을 제지하기 위해 경찰이 출동할 정도였다니까요.
<봄의 제전>을 선보인 이후 갑작스러운 결혼과 해고로 인해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된 니진스키의 나이는 고작 20대 후반이었어요. 니진스키가 춤췄던 시간은 고작 10년 남짓인 셈입니다. 니진스키 전기를 쓴 무용 평론가 리처드 버클(Richard Buckle, 1916~2001)은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어요.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나머지 30년은 암흑 속에 가려진 채 살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춤의 신’이라는 별명을 갖고 무용계 역사를 새로 썼던 니진스키! 그가 안무가가 아닌 무용가로서 춤만 췄다면 어땠을까요. 개혁을 꿈꾸지 않고 전통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오래오래 무대 위에서 재능을 펼칠 수 있었을까요?
ㅇ참고자료
- - 리처드 버클, 이희정 옮김, 『니진스키 인간을 넘어선 무용』, 을유문화사, 2021.
- - 오윤빈, “암흑 속에서 빛났던 춤의 신, 바슬라프 니진스키”, 스토리오브서울, 2008.
- - 장지영, “니진스키는 어떻게 발레의 전설이 됐나”, 경향신문, 2019.
- - 조성준, “'춤의 神' 니진스키, 발레를 아름다움에서 해방시킨 혁명가”, 매경프리미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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