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클림트, 휘황 찬란 황금 뒤 엿보인 삶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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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은 황금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시나요? 돈, 금팔찌, 금목걸이, 금괴... 일단 값비싼 물건부터 생각날 거 같은데요. 쉽게 가지지도 못하는 귀한 금덩이를 그림에다 마구 붙인 화가가 있어요. 때문에 ‘황금의 화가’라는 별명을 얻게 되기도 했죠. 혹시 황금 하면 떠오르는 것 중에 그의 작품도 있었나요? 뒷구르기 하면서 봐도 번쩍번쩍 빛나는 그림의 주인공,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금빛으로 가득한 그의 그림을 통해 알아볼까요?

 

👀세공하듯 그림을 그린 섬세한 화가, 클림트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난 클림트는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금세공사이자 판화가였지만,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죠. 아버지의 수공예품을 보며 자란 클림트는 화려한 장식과 세세한 디테일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어요. 이후 클림트는 동생 에른스트와 함께 예술가를 꿈꾸게 되었죠. 클림트는 재정적인 문제로 14세에 학교를 그만두게 되는데요. 하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친척의 도움으로 빈 국립응용미술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답니다. 그는 회화와 수공예 장식 교육을 받으며 자신의 재능을 통해 안정적인 수입을 얻고자 했어요. 돈을 벌어야 했던 그는 동생 에른스트, 친구와 함께 공방을 차려 15년간 공공건물에 벽화 그리는 일을 했죠.

  박물관, 극장 등 여러 공공건물에 장식화를 그려 건축장식미술의 대가로 자리를 굳히던 1890년 어느 날, 그는 구 시립극장의 실내 풍경화 작업을 의뢰받았어요. 풍경화의 주제는‘마지막 공연’이었는데요. 당연히 극장의 실내 전경이나 공연의 하이라이트를 그릴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클림트는 무대가 아닌 객석의 모습을 그렸어요. 전혀 다른 그만의 시선을 증명한 것이었죠. 더 놀라운 것은 객석에 있는 150명의 얼굴을 모두 정교하게 묘사했다는 점인데요. 초상화와도 같은 묘사 능력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그는 황금공로십자훈장상까지 받게 됩니다. 그야말로 출셋길이 열린 것이었죠. 그 작품이 바로 <구 부르크 극장의 내부 전경(1888)>이에요. 
 

<구 부르크 극장의 내부 전경(1888)> ©kornan.tistory.com

 

💔잘 나가는 작가, 주류 미술계와 분리를 선언하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클림트에게 큰 시련이 찾아오는데요.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고, 예술적 동지였던 동생 에른스트가 독감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었죠. 일순간에 가장 가까웠던 두 사람을 떠나보낸 클림트의 마음에는 큰 동요가 일어났어요. 그는 이후 약 3년 동안 작품 활동을 접습니다. 이후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운명은 클림트에게 중요한 화두가 되는데요.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는 자신의 삶과 내면을 성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년 만에 새로운 화풍으로 작품을 내놓았죠.

  하지만 오늘날 많은 이들로부터 각광받는 그의 새로운 화풍이 처음부터 찬사를 받았던 것은 아니에요. 1894년, 당대 최고 명문대였던 빈 대학에서는 클림트와 그의 동료들에게 천장화 작업을 의뢰했는데요. 철학, 의학, 법학 세 가지의 파트로 나눠 ‘이성의 위대함과 그것이 사회 진보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그림으로 표현’할 것을 요구했죠. 전통과 권위를 중시하는 고전주의적 경향을 가졌던 이전과는 달리 클림트는 자유롭고 파괴적이며 관능적이기까지 한 그림을 선보이게 됩니다. 벌거벗은 여인들이 주를 이룬 철학, 기괴한 포즈를 한 법학, 시체와 해골이 뒤엉킨 모습인 의학 그림은 환영받지 못했고 빈 대학의 교수들은 절대 반대를 외쳤어요. 이를 계기로 클림트는 벽화를 비롯한 공공 작품들을 더 이상 의뢰받지 않게 되었죠. 당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주류 미술계는 매우 보수적이었어요. 당연히 클림트의 벽화를 탐탁지 않아했죠. 때문에 클림트의 작품이 오스트리아 주류 미술계의 전시에서 출품을 거부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그의 신경은 곤두서기 시작했어요.

 

클림트가 작업한 빈 대학의 천장화. 왼쪽에서부터 철학, 의학, 법학 ©이슈메이커

 

  클림트는 결국 주류 미술계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당시 마음이 맞던 화가들과 함께 빈 미술가 협회를 탈퇴하고 새로운 집단을 만드는데요. 바로 ‘빈 분리파’ 예요. 총 19명의 예술가가 모였고 클림트는 빈 분리파의 초대 회장이 됩니다. 빈 분리파는 말 그대로 빈의 주류 예술로부터 분리된 미술을 시도한다는 의미였어요. 기존의 기관이나 아카데미 중심의 전시에서 벗어나겠다는 포부를 나타냈죠. 빈 분리파는 잡지를 창간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고, 자신들만의 전시회도 이어나갔어요. 젊은 화가들을 위한 빈 분리파의 미술관, ‘제체시온’을 짓기도 했고요.

 

제체시온
빈 분리파를 위한 미술관 ‘제체시온’ ©트리플

 

  클림트는 이 미술관이 미술, 조형, 건축, 음악 등 모든 예술이 어우러진 복합 예술공간이 되길 바랐어요. 그 목표를 실현한 대표적인 전시회가 바로 베토벤을 오마주한 14번째 전시회입니다. 그는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의 4악장인 <환희의 송가>를 벽화로 구현했는데요. 그 결과 길이 약 34m, 높이 2m의 대표작 <베토벤 프리즈>(1902)가 완성되었답니다. 이 작품에는 유리, 금속, 자개, 황금과 각종 보석류 등 값비싼 재료가 아낌없이 사용됐어요. 그만큼 클림트는 이 작품에 온 신경을 쏟았던 거예요. 그림 설명을 잠깐 해볼까요? 클림트는 베토벤 음악의 선율과 분위기를 의인화해서 표현했어요. 오직 예술만이 우리를 낙원으로 데려다준다는 의미, 인류가 찾던 행복과 환희, 순수와 사랑도 가득 그렸고요. 베토벤의 음악처럼 클림트의 황금색 광채도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베토벤 프리즈>를 기점으로 클림트는 그림에 황금색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죠.

 

<베토벤 프리즈(1902)> ©Wikimedia

 

  성장 가도를 달리던 1905년, 클림트는 돌연 분리파를 떠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개인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하는데요. 이 시기부터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가며 황금의 시대를 알리게 돼요.

 

🤤황금과 에로티시즘이 부르는 환희

  클림트는 어렸을 적부터 접했던 고전 벽화의 양식과, 자신이 장식 건축가로 구축해 온 예술적 방향성, 그리고 여성의 누드를 통해 추구한 순수한 아름다움을 작품 속에 녹여냈어요. 그 결과 클림트의 대작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화려한 색감과 관능적인 피사체, 평면과 입체감이 뒤섞인 그림! 황금 금박까지 어우러진 클림트의 작품은 고귀하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풍깁니다. 클림트는 사람들이 작품 자체에 매혹되고 환희를 느끼길 바랐어요. 그래서 황금 금박을 활용해 작품이 그 자체로 우리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만들었죠. 이것이 이른바 ‘클림트의 황금시대’입니다.

  1901년 다섯 번째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작품 <유디트Ⅰ>은 앞서 이야기한 클림트만의 화법이 담긴 황금 작품이에요. 유디트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여인인데요. 클림트는 여인이 적장에게 투항하는 모습을 색다른 시선으로 담고자 했어요. 파멸에 이르게 할 정도의 성적 매력을 의미하는 ‘팜므파탈’에 주목한 거죠. 그림의 중심에 그려진 유디트의 손은 처참히 잘린 한 남성의 머리에 살며시 놓아져 있어요. 밑을 바라보며 살짝 감긴 눈과 약간 벌어진 입술, 유혹하는 듯한 눈빛은 에로틱한 분위기를 더욱 짙게 만들고요.  1907년 그려진 <키스>는 오늘날 클림트의 고민이 담긴 명작이라고 평가받습니다. 그는 키스하는 연인을 통해 사랑의 본질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키스로부터 펼쳐지는 사랑의 고결함과 찬란함을 황금을 통해 그려낸 거죠. 클림트는 이후로도 수많은 작품을 그렸습니다. 여인들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고 주변 풍경도 그렸죠. 무려 245점 정도를 남겼는데, 그의 작품 대부분이 손에 꼽히는 명작이랍니다. 그가 독보적인 화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겠죠?

 

성서의 내용을 토대로 한 작품 <유디트Ⅰ> ©Wikimedia
에로티시즘과 삶과 죽음에 대한 클림트의 철학이 담긴 <키스> ©Wikipedia

 

😮독신주의자의 스캔들

  클림트는 여성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그림 속 여성들은 모두 실존하는 모델이었고 그의 화실에 매일 같이 방문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모델들과 성적 관계를 맺었어요. ‘빈의 카사노바’라는 꼬리표가 그를 따라다닐 정도였답니다. 클림트가 사망한 이후 사생아를 낳은 여자들이 생계 부양비를 청구한 소송만 14건이 넘어요. 그만큼 성과 사랑에 자유로웠다는 뜻 같은데요. 이처럼 에로틱한 관계에만 집중한 듯한 그에게도 플라토닉 러브가 있었답니다.

  클림트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던 이는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인인데요. 클림트가 활동하던 시기의 여성은 대부분 무직이었으나 에밀리는 달랐어요. 패션계를 주름잡던 독립적인 여성 중 한 명으로, 현재도 1세대 패션 디자이너라 불린답니다. 당시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은 마지막 황금기라고 불릴 정도로 풍요가 넘치는 시대였고 더불어 예술과 패션도 발달했는데요. 그는 이러한 배경을 발돋움 삼아 당대 여성이 강요받던 코르셋을 벗어난 새로운 패션을 선도했어요. 현재 패션계에서는 에밀리를 기리는 패션쇼를 진행하기도 하죠.

  이 둘의 만남은 사제관계로부터 시작되었어요. 상류층 가정이었던 에밀리의 집안에서는 미술 과외 선생님을 구하게 되는데요. 그 선생님이 바로 24살의 구스타프 클림트였답니다. 당시 12살이었던 에밀리는 과외 선생님에게 푹 빠져버렸어요. 몇 년 후, 에밀리의 언니와 클림트의 동생이 결혼하게 되면서 둘은 사돈지간이 됩니다. 가족 관계가 되며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졌죠. 클림트는 메모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글자 혐오증이 있었는데, 에밀리에게만큼은 꾸준히 러브레터를 보냈어요. 그 편지 수가 무려 400통에 달한답니다. 편지에는 로맨틱한 내용뿐만 아니라 상황을 보고하는 메시지도 다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카카오톡 메신저와 비슷한 역할을 한 것이었죠. 종일 그림을 그렸던 클림트는 1년의 절반 동안 휴가를 즐기곤 했는데요. 휴가를 떠날 때는 항상 에밀리와 함께하기도 했답니다. 그는 둘만의 휴양지인 오스트리아 아터제 호수에서 풍경화를 그리며 휴식을 취했어요. 에밀리와 함께할 때 그렸던 그림은 고요하고 평온해요. 따뜻한 느낌까지 들죠. 클림트에게 에밀리는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을 거예요. 그러나 동시에 클림트의 화실엔 매일같이 여인들이 들락거렸고, 그 사실을 에밀리가 모를 리 없었어요. 클림트의 여성편력은 더욱 심해졌지만, 에밀리는 그저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켰고 그 이상 다가가지 않았죠.

 

클림트가 에밀리와 휴가를 보낸 아터제 호수의 그림 ©아트앤아트

 

  클림트가 성적인 관계를 주고받았던 모델들과 에밀리를 다른 마음으로 대했다는 것은 그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어요. 클림트의 그림에서 대부분의 여성은 옷을 벗고 있지만, 에밀리의 초상은 옷을 다 입고 있죠. 모델의 표정은 관능적이지만 에밀리의 초상은 평온하고 무표정이에요. 그림들을 비교해보면 에밀리의 초상이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요.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1902)> ©Mycelebs

 

 클림트는 죽을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주의자였어요. 그의 인생을 통틀어 수많은 여성과 스캔들이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았던 그의 사랑은 에밀리 단 한 명뿐이었죠. 클림트가 죽을 때까지 둘은 플라토닉 러브를 이어갔고, 클림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외친 이름은 에밀리의 이름이었다고 전해지고 있기도 합니다.

 

  클림트의 작품들은 화려한 색감과 유려한 선, 매혹적인 피사체,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분위기로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각종 매체와 산업을 통해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스토리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죠.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그의 작품이 꾸준히 사랑받는 것은 비슷한 화풍조차 찾을 수 없는 독보적임 때문일 것이에요.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며 황금시대를 개척한 클림트, 그는 지금보다 먼 훗날에도 사랑받고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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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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