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기술을 다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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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기술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아주 잘 그려진 그림을 볼 때, 예술인지 고도의 기술인지 헷갈리더라고요. 게다가 요즘은 디지털 기술이 발달해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 작품을 만들기도 하잖아요. 알고리즘을 활용해 일러스트 작품을 만들어 내고, 디지털 툴로 원본을 비틀어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죠.
예술과 기술의 경계가 모호한 순간은 꽤나 오래전부터 벌어진 일이에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과학과 예술을 모두 가리켜 테크네(Techne)라고 불렀거든요. 이후 두 개의 언어로 분화되기는 했지만, 예술과 기술은 본래 하나였듯 아주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이죠. 오늘날의 미디어아트와 같이 디지털 기술로 예술적인 표현을 이루어 내는 분야를 보면, 두 영역의 경계가 더욱 모호해요. 이처럼 기술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기술이 되는 히토 슈타이얼의 미디어아트 전시 <히토슈타이얼: 데이터의 바다>를 소개할게요.
👩🎨히토 슈타이얼, 어떤 사람이지?
유쾌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분위기의 여성이 보이세요? 작가 히토 슈타이얼이 본인의 작품에 등장한 모습이에요. (이 포즈... 한번 따라 해 보고 싶은데요?) 히토 슈타이얼은 독일의 시각예술가이자 영화감독, 비평가이자 작가예요.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다능인처럼, 그의 활동은 한 가지 분야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는 예술과 철학, 정치 영역을 넘나들며 미디어아트를 통해 이미지와 기술, 사회문제의 관계를 풀어내요. 작품의 주제는 모두 명확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담긴 언어는 서로 다른 분야의 것으로 얽히고설켜 있음을 알 수 있죠. 때문에 그의 작품은 얼핏 보면 서로 무슨 관계가 있나 싶을 만큼 생경한 이야기의 조합이에요. 제가 몇 가지 예시를 말씀드릴게요. 어떤 의미일지 한번 맞혀보세요!
첫째, ‘발렌시아가’와 ‘프롤레타리아1)’
둘째, ‘동물 검투사 메타버스’와 ‘양치기 소년’과 ‘경제학자 케인즈’
셋째, ‘댄싱마니아’와 ‘전염병’
1)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는 노동계급을 의미해요. 자기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직 살기 위한 노동만을 필요로 하는 임금노동자 계급을 이야기하죠.
… 당최 무슨 소리냐고요? 세상에는 우리가 마주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잖아요. 히토 슈타이얼은 사회현상을 관찰하고,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을 조각낸 후 그것들을 다시 이어 붙여 의미를 만들어 내요. 첫 번째 단어의 조합을 풀어볼게요. 발렌시아가는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변화와 함께 변화를 거듭하며 하나의 패션 데이터로 작동하죠. 그런데 명품 브랜드 발렌시아가(Balenciaga)의 모조품인 ‘벨란시지(Belanciege)’가 노동자 시위 현장에서 발견된 거예요. 마침 발렌시아가 패션쇼는 단테의 ‘지옥’의 구조를 너무도 닮았고요. 그리고 작가는 묻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지금도 존재하지 않을까?' ‘벨란시지 운동화는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권리를 돌려달라는 의미가 아닐까?’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심화된 독일의 경제적 불평등은 어떤 방식으로 강화되고 있을까?’ 등과 같이 말이죠.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미션 완료: 벨란시지>예요. 히토 슈타이얼은 노동자라는 정체성에 집중하며 사회, 정치, 문화적 현상을 탐구한 것이죠.
이처럼 작가는 특별히 ‘역할’과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며 그것을 작품에 반영하곤 하는데요. 미술관의 역할을 주제로 한 작품 <면세미술> 역시 마찬가지예요. 면세를 뜻하는 duty free는 ‘세금이 없는’, 그리고 ‘의무가 없는’ 두 가지 뜻을 가져요. 작가는 면세(duty free) 구역인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자유항 미술품 수장고를 예로 드는데요. 이러한 미술관은 데이터가 불투명하고, 언제나 이동하기 때문에 조세 피난처로 활용되고 있답니다. 세금과 의무가 모두 면제된 미술관인 것이죠. 그런가 하면 프랑스 루브르는 파리의 주요 봉기 때마다 공격을 받고, 터키의 한 시립미술관은 난민 대피소로 사용되기도 해요. 이에 작가는 미술관이란 무엇인가, 어떤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는가를 고찰하며 동시대 미술의 역할을 상기시켜요.
🌊왜 <데이터의 바다>야?
이번 전시의 제목, 왜 <데이터의 바다>일까요? 요즈음의 데이터는 곧 자본이에요. 모든 행동과 생활이 빅데이터로 저장되는 사회니까요. 우리는 약 15년 전 인터넷을 통해 만났던 ‘정보’의 바다를 넘어 더욱 미세하게 쪼개진 ‘데이터’의 바다에 살고 있어요. 그래서 전문가들은 종종 데이터는 못 속인다고들 하는데요. 히토 슈타이얼 작가는 ‘인공 우둔함’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이에 반박했어요. 데이터를 해독하고 처리하는 패턴에서 벗어나면, 알고리즘은 무용해진다는 점을 포착한 거예요. 인공 지능(AI)과는 정반대로 향하는 이야기죠.
그렇다면 어떻게 알고리즘의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는 직접 등장한 작품 <안 보여주기: 빌어먹게 유익하고 교육적인.MOV>을 통해 식별 가능한 패턴 밖에 존재하는 방법, 즉 데이터 속에서 숨는 방법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냈어요.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1 픽셀(pixel)보다 작아져 불량 화소가 될 수도 있고, 필터에 걸린 스팸이 될 수도, 국가의 적으로 실종자가 될 수도,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50대 여성이 될 수도 있죠.(이는 작가 스스로를 빗댄 자조적인 유머랍니다!) 또한 작가는 알고리즘으로 인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위계가 결정된다고 꼬집었어요. 일부러 숨는 게 아닌, 어쩔 수 없이 소외된 존재도 있다는 건데요. 삭제되고, 생략되고, 격리, 말살되는 것들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데이터의 바다가 가지는 위험성을 재고합니다. 안 보이도록 숨는 방법도 비현실적인데, 막상 드러내고 싶을 때는 그걸 선택할 수 없는 현실이네요.
작가는 우리가 데이터 세상을 무조건 수용하기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고 성찰하길 권유해요. 결국 데이터의 바닷속에서 어떻게 헤엄쳐 나가는지는 각자의 몫이죠. 우리는 과연 데이터 속에 숨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데이터의 바닷속으로 휩쓸리게 될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데이터 위에서 자유로이 항해하게 될까요?
🔮기술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히토 슈타이얼은 데이터 세상에서 표류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기술은 우리에게 무엇이 될 수 있겠느냐고 말이죠. <이것이 미래다>라는, 많은 이들에게 약간의 충격을 건네줄 법한 작품을 들어보겠습니다. 주인공은 쿠르드족 여인 헤자(Heja)인데요.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헤자가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 예측해요. 그 바람에 헤자는 졸지에 감옥에 가게 되죠. 이후 헤자는 교도관의 감시를 피해 마술적인 치유의 힘을 지닌 꽃을 피워내요. 그리고 이 꽃들까지도 인공지능과 예측 알고리즘으로 자신의 미래를 예측합니다. 그렇게 미래를 예측하는 하나의 미래 정원 시스템이 만들어지죠. 예측에 예측이 더해지고, 미래가 현재를 앞지르며 급속도로 전개되는 영상의 말미에, 헤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미래가 예측되면서.. 현재는 예측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작가는 묻습니다. 우리는 이제 과거 데이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한다고 자만하지만, 국제위기는 왜 예견하지 못했는가? … 데이터는 무엇을 예측할까요? 전쟁은요? 죽음은요? 왜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은 정작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를 예견하지 못할까요? 영상의 말미에서 헤자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예측해요. “나는 그걸 찾으러 가지 않을 거다. 그것은 이미 여기 있다. 미래가 어디에 있든 언제나 지금 여기서 시작한다. 이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미래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요? 기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화려한 디지털 기술로 만들어진 예술작품을 보다 보면 이걸 예술이라고 해야 할지, 기술이라고 해야 할지 고민돼요. 특히 미디어아트라면 기술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요. 히토 슈타이얼은 작품의 내용에서도 기술과 다른 것의 관계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답니다. 예술이 차용하고 있는 기술의 미래를 고찰하며 기술의 역할을 고민하고, 기술이 이끄는 시대의 정체성을 파헤치고, 기술로 인해 변화하는 예술의 역할과 미술관의 정체성을 함께 고심하면서 말이죠.
전시 <히토슈타이얼: 데이터의 바다>는 데이터와 디지털, 기술이 끝없이 성장하는 이 시대에 미디어와 이미지, 기술과 사회와의 관계를 진지하고도 트렌디하게 다룬 전시예요. 또한 지금 지구 어딘가에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기에, 작가의 작품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각종 변화와 재난, 전쟁 속에서 기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죠.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MMCA)에서 9월 18일까지 열린다고 하니, 방문하셔서 데이터의 바닷속을 함께 헤엄쳐 보시길 바랄게요!
✅솔직 핵심 정리 노트
ㅇ박수갈채드립니다
- 작품이 셀 수 없이 많았는데 모두 주제의식이 명확한 작품들이었어요. 하루 안에 다 보지 못할 정도로 알찬 구성이었답니다!
- 빈백과 썬베드에 눕거나 짐볼에 앉아서 보는 등, 자유롭고 편한 분위기에서 감상하는 전시라 국립미술관의 정적이고 형식적인 이미지를 깨트려주었어요.
ㅇ요건 쫌 아쉬운데
- 팸플릿에 적힌 설명을 보지 않으면 작품 이해가 쉽지 않은 전시예요. 그러나 결국은 스스로 해석해 의미를 만들어가는 재미도 있어요.
- 평균적으로 각 영상은 20분 이상의 길이로 연속 상영되기 때문에, 이동하며 일부만 보았을 때엔 혼란스러울 수 있어요. 시간을 충분히 두고 전체적으로 관람하며 작가가 던지는 생각의 바다에 빠져보시길 추천드려요.
💬Editor’s Comment
이 전시… 사실 ‘좀 난해하고 어려운데?’ 하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철학, 정치, 미술사, 사회문제 등의 이슈가 담겨 있어 생각보다 너무 깊다고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웃긴 포인트도 아주 많다고요! 예를 들어, 작품 <미션완료: 벨란시지>에서는 “벨란시지 운동화라면 중력을 거스르고, 우주선처럼 우주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라며 의회에서 물건을 내동댕이치는 의원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함께 보여주고요. 작품 <소셜심>에서 납치당한 미술작품은 이렇게 말해요. “저는 맹세코 레오(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딱 한 번 봤어요. 저를 그렸을 때 말이죠!"라고요. 또 <야성적 충동>에서는 경제학자 케인즈의 아바타가 늑대 탈을 쓰고 춤추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해요. 물론 블록코인과 NFT 등 디지털 자본주의를 꼬집어 풍자하는 진지한 분위기의 다큐멘터리였지만, 히토 슈타이얼은 반복되는 기묘한 효과음과 행동,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들, 쏟아지는 이미지 등을 조합해서 소위 ‘병맛’ 넘치는 영상을 만들어요. 작품을 관람하다가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신다면, 제대로 보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여러분도 작품 속에서 웃음 포인트를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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