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 독학 화가가 궁정화가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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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수많은 오해 중 대표 격으로 여겨지는 유명한 대사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스러운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진 이 말은, 실은 화자가 불분명한 루머인 것으로 밝혀졌죠.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편파적이라는 주장에 따라 오늘날 그에 대한 재평가가 다수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무려 300여 년 전, 마리 앙투아네트가 실재하던 18세기 프랑스에도 그에 대한 억측을 막고 왕비로서뿐 아니라 인간 마리 앙투아네트의 다양한 면모를 캔버스 안에 옮기고자 했던 화가가 있습니다.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공식 초상화가, 엘리자베트 비제-르 브룅(Élisabeth Vigée-Le Brun, 1755~1842)이죠.
💥독학으로 초상화의 귀재가 된 소녀, 궁정화가가 되다!
엘리자베트 비제-르 브룅은 1755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어요. 화가인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배웠는데, 파스텔을 사용해 초상화를 주로 작업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 역시 상당수의 초상화를 남겼답니다. 12살 무렵, 아버지가 사망한 뒤 어머니가 재혼을 하게 되면서 그의 가족들은 파리의 중심부로 나아가게 되는데요. 덕분에 그는 당대 큰 명성을 가지고 있던 화가들을 만나 그림에 대한 조언과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다양한 미술관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왕궁에서 개방한 소장품들을 볼 수 있게 되기도 했고요.
그래서였을까요? 여성으로 태어나, 체계적인 교육이라곤 일절 받지 못했던 비제-르 브룅은 10대 시기에 이미 초상화에서만큼은 어떤 전문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어요. 때문에 그는 초상화를 판매하고 화실을 운영하며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죠. 그런 비제-르 브룅이 19세가 된 어느 날, 그의 화실은 폐쇄될 위기에 처하고 말아요. 작업실이자 판매장인 화실을 운영하고 그림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어 상업 활동 면허를 받아야 했는데, 그는 이 면허가 없었기 때문이죠. 18세기에 미술을 비롯한 모든 학문은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는 것이 ‘정석 루트’,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것이라고 여겨졌는데요.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아카데미는 왕가에서 주도하는 왕립아카데미였지만, 여성이 이곳의 회원이 된다는 일은 암묵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때문에 그는 왕립아카데미보다는 낮은 명성을 가진 생 뤼크 아카데미에 등록해 활동을 이어나가게 되었죠.
비제-르 브룅이 초상화를 판매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림실력에 더해진 센스의 영향이 굉장히 커요. 우선 그는 유행에 관심이 많아 뛰어난 패션 감각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유행하고 있거나 고객의 매력을 드러낼 수 있는 소품과 포인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그림에 담아낼 줄 알았던 거죠. 탄탄한 묘사력이 자랑이었던 그의 그림에 세심한 관찰력까지 더해졌으니, 오밀조밀 장식적인 디테일을 사랑했던 18세기 로코코 시대에 얼마나 걸맞은 그림이었을지 짐작하시겠죠?
비제-르 브룅이 고객을 대하는 태도 역시 그의 인기비결 중 하나였어요.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초상화 작업 시에는 고객과 여러 대화를 나누게 되기 마련인데요. 그는 초상화를 그려주는 과정에서 자신의 모델에게 깊은 대화와 공감을 건넸어요. 단지 돈을 벌기 위한 과정, 한 사람을 정확히 묘사하기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던 다른 화가들과는 달랐죠. 특히 그 역시도 힘든 결혼생활을 겪고 있던 터라 내적으로 힘든 여성 고객들에게는 그의 공감과 위로가 더욱 와닿았을 테고요. 깊은 대화는 곧 모델에 대한 깊은 이해를 불러왔고, 그는 그 이해를 바탕으로 초상화를 그렸는데요. 때문에 많은 이들은 그의 그림 속에 자신의 생각과 내면세계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고 느꼈어요. 로코코 시대에 어울리는 화려한 색채, 하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진실됨은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가게 만들기에 충분한 반전 매력이었죠.
그에 대한 소문은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1779년 불과 24세의 나이에 그는 베르사유 궁전에 초대되어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그립니다. 그와 동갑내기였던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그의 그림이 가진 진솔한 매력에 푹 빠져들었어요. 궁정에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줄 저명한 작가들은 많았지만, 왕비는 비제-르 브룅이 그린 초상화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죠. 결국 비제-르 브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공식 초상화가로 임명되었어요. 이후 그는 30점이 넘는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밀한 관계를 쌓게 되죠. 그는 왕비의 총애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의 공식 초상화가가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왕립아카데미에 들어가길 원했던 마리 앙투아네트 덕분에 회원 모두가 남성이었던 왕립아카데미에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서 당당히 이름을 올리기까지 하죠.
물론 이 과정에서도 잡음은 있었어요.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의 남편 루이 16세가 자신들의 영역에 간섭한다고 느낀 왕립아카데미는 당시 공공연하게 비제-르 브룅의 라이벌로 여겨지고 있었던 아델라이드 라비유 귀아르(Adelaide Labille-Guiard, 1749~1803)를 동시에 회원으로 받아들이는데요. 이는 자신들의 불편한 마음과 반발심을 표현한 것이었죠. 하루에 한 명 이상의 여성 회원을 받아들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정이었지만 그렇잖아도 오스트리아에서 온 왕비가 달갑지 않았던 귀족들은 너도나도 자신들의 화가로서 라비유 귀아르를 발탁하는 것으로 뜻을 보태기도 했어요.

비제-르 브룅과 라비유 귀아르의 라이벌 구도는 이와 같은 정치적 싸움에 휘말려 더욱 공고해졌어요. 같은 시기에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 된 두 여성 작가였기 때문에 안 그래도 작품부터 외모, 초상화 속 모델까지 항상 비교당하기 일쑤였는데 말이죠. 그들은 같은 해에 비슷한 구도와 의상의 초상화를 각각 하나씩 그렸는데요. 이 두 작품을 통해서도 당시 프랑스 왕실을 둘러싼 정치적 견제와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어요.
비제-르 브룅은 이전과 달리 세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단란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왕비의 모습을 그렸는데요. 때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불과 2년 전이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해보았을 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국고를 낭비하고 있다는 인식이 점점 극에 달하고 있었던 터라 아이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내세워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의도였음을 알 수 있어요. 한편, 비제-르 브룅이 왕비에게 사랑받는 동안 그의 라이벌 라비유 귀아르는 마리 앙투와네트와 척을 지고 있던 루이 16세의 고모, 누이들로부터 총애를 받았어요.


프랑스의 왕실이 위태롭던 당해, 라비유 귀아르 역시 하나의 초상화를 그립니다. 모델은 루이 15세의 딸이자 루이 16세의 고모 중 한 명인 마담 아델라이드였어요. 그림 속 그는 자신의 아버지 루이 15세와 어머니 마리 레슈친스카, 자신의 오빠 등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집오기 전 왕가의 인물들을 그리고 있는데요. 이들이 있던 때가 바로 프랑스의 영광의 시대였음을 넌지시 이야기하는, 다분히 정치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죠. 한눈에 봐도 비슷한 이 두 작품은 심지어 아카데미 주도 살롱전에서 바로 한 작품만을 사이에 둔 채 나란히 전시되기까지 합니다. 비제-르 브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력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그에 걸맞은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궁정화가가 된 이후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타인과의 비교와 정치적 논쟁에 끊임없이 휘말리게 된 거예요.
😬감히(?) 이를 드러내고 웃다니!
비제-르 브룅은 미술사의 교과서로 여겨지는 곰브리치의 저서, 『서양미술사』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성 화가예요. 여성이 자유롭게 활동하기 어려웠던 18세기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금기를 거스르고 끊임없이 도전했던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죠.
그는 아카데미에서 만난 동료 화가와 결혼한 이후 여성은 결혼 후 가정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인식에 정면으로 맞서며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어요. 살롱전에도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며 자신의 경력을 차곡차곡 쌓아갔고요. 궁정화가로서 한창 잘 나가던 무렵, 비제-르 브룅은 자신의 딸을 안고 있는 자화상을 그렸는데요. 따뜻함과 사랑스러움이 넘치는 이 그림은 놀랍게도 처음 공개되었을 때 동료 화가들과 비평가, 후원자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로부터 지탄을 받았어요. 그동안 미술계에서 지켜오던 전통을 깨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죠. 바로,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것이었는데요. 이를 드러낸 것이 뭐가 그렇게 문제였을까 싶을 수도 있겠어요. 하지만 18세기 유럽 사회에서는 위생관념이 그다지 좋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의 이가 검게 썩어 있거나 지독한 구취가 나곤 했거든요. 때문에 이를 드러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미치광이나 가능한 일이었죠. 기존의 화가들이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그림을 그렸던 것뿐인데 수많은 비난을 받았으니, 의기소침해질 만도 하죠? 하지만 비제 르-브룅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몇 년 뒤에 그린 자화상에서도 이를 드러내고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을 그렸죠. 오히려 보란 듯이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딸까지도 이를 보이고 환히 웃고 있는 그림이었어요.

🙄드레스만 다른 같은 작품?
비제-르 브룅이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는 무려 30여 점에 이르지만,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같은 해에 그려진 두 작품이에요. 자세히 보면 의상만 다를 뿐 구도는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두 그림 모두 캔버스 속에서 꽃을 만지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리기도 했고요. 연작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비슷한 그림을 의상만 바꾼 채로 그렸던 걸까요?


먼저 그려진 작품을 보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얇고 하늘하늘한 면 방직물인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있어요. 하얀색의 단순하고 수수한 드레스에 보석 하나 없는 넓은 챙의 밀짚모자까지 더해진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은 현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세련될 만큼 자연스럽고 청초한 매력을 드러내죠. 하지만 당해 살롱전에 출품된 이 그림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돼요.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사람이 다름 아닌 프랑스의 왕비였기 때문인데요. 마리 앙투아네트의 패션은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국내외 패션 산업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지대한 관심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18세기 로코코 시대는 풍성하면서도 섬세한 레이스와 화려한 보석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실크 드레스가 유행하던 때였고요.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권력의 최정점에 있다고 여겨지는 왕비가 드레스 아래 받쳐 입던 속옷, 슈미즈와도 다름없는 밋밋한 차림으로 초상화를 그린 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죠.
더군다나 당시 모슬린을 만들기 위한 면화는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아주 비싼 가격으로 프랑스에 수입되곤 했는데요. 14세기 발발했던 영국과의 백년전쟁 이후로 프랑스와 영국, 양국 간의 국민정서는 최악에 치달아 있었는데, 하필이면 프랑스의 왕비가 영국 수입품을 애용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 거예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일을 계기로 ‘영국 좋은 일만 해주러 온 오스트리아 여자‘라는 거센 비난을 받게 되고, 사치스럽고 향락적이라는 이미지는 더욱 굳어졌어요. 결국 이 그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철거되었고, 비제-르 브룅은 재빨리 새로운 초상화를 그리는데요. 한 달 뒤, 이번에는 전형적인 로코코 양식의 드레스를 입은 채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왕비의 초상화가 공개돼요. 국내 실크 산업을 독려하기 위해 프랑스의 실크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있죠. 이처럼 비제-르 브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가이자 친구로서 왕비의 다양한 면모를 그림으로 남기고자 했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비난을 받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이미지 쇄신을 위해 힘썼어요.
엘리자베트 비제-르 브룅은 한평생 우여곡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생을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이 무색하게도 사후에는 점점 사람들로부터 빠르게 잊혀 갔어요. 그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가 실제로는 희대의 악녀가 아니었음이 드러난 이후였죠. 어쩌면 그는 자신이 그리기로 선택한 장면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올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천진한 태도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나 싶어요. 많은 예술가들이 사회적인 압박으로 인해 뛰어난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고초를 겪으며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는 평을 받아요. 비제-르 브룅 역시 그중 하나고요. 하지만 비제-르 브룅은 자신이 마주치는 한계에 낙담하지 않고 의연하면서도 굴하지 않는 태도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갔어요. 순수하고 개성 있는 화가로 비치지기를 원했던 그의 바람이 오늘날에서야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ㅇ참고자료
- 이은화, “[KOSMO CULTURE 그림보고 화가 읽기] 미술사가 놓친 위대한 여성화가,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룅”, KOSMO 한국조폐공사, 2021
- 이유리,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여적여’ 프레임 속에 가둬버린 실력파 화가들”, 한겨레, 2020
- 이윤희, “[여성의 눈으로 읽는 열 가지 미술 키워드] 여성화가들끼리 경쟁 조장... 주류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낳다”, 충청매일, 2019
- 윤민주, 「비제 르 브룅(Vigee-Le Brun)회화의 초상화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 “엘리자베트 비제 르 브룅”, 위키백과, https://bit.ly/3docC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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