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를 향한 꿈, 안나 파블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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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재능이 뛰어났던 이들의 영향을 받은 지금 세대의 사람들을 우린 ‘OOOkids’라 부르곤 하죠. 그중에서도 이전의 그들처럼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이들을 ‘제2의 OOO’라 칭하기도 하고요. 이렇게, 끊임없는 노력으로 재능을 가꾸어 ‘천재’라 불렸던 사람들의 이름은 쉽게 잊히지 않고 귀감이 되어 남아있어요. ‘안나 파블로바’라는 이름도 그렇습니다. 많은 유명 안무가와 발레 무용수들이 그의 공연을 접한 후 무용수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해요. 현재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인 스페틀라나 자하로바는 ‘재림한 안나 파블로바’로 불리기도 하는데요.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 그는 누구일까요?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은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는(Anna Pavlova,1881~1931)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어요. 세탁소에서 일했던 그의 어머니는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딸에게 매우 헌신적이었어요. 안나가 여덟 살이 되던 해, 그는 어머니와 함께 우연히 마린스키 극장에서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처음 보고 발레리나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안나의 어머니는 어린 딸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황실 발레 학교로 찾아갔는데요. 당시 안나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비쩍 말랐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어요. 다행히도, 그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본 사람이 나타났는데요. 바로 고전발레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리우스 프티파였어요. 프티파에게 발탁된 안나는 10세 때부터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죠.

여차 저차 해 황실 학교에 입학하긴 했지만, 힘 있고 테크닉적인 동작들을 소화해야 했던 전통적인 러시아 발레단의 기준에서 안나 파블로바는 결코 이상적인 발레리나는 아니었어요. 그의 무릎은 춤을 출 때 곧게 펴지지 않았고, 발레에서 가장 중요한 턴-아웃 자세는 제대로 취하지도 못했어요. ‘빗자루’라 놀림받았을 만큼, 깡마른 몸도 마이너스 요소였죠. 특히, 유독 약했던 그의 발목은 회전과 고난도 기술에서 항상 걸림돌이 되었었어요.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알고 있었던 안나 파블로바는 오기와 독기를 품고 연습에 매진했어요. 자신의 체형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테크닉을 연습한 탓에, 크게 부상을 입는 경우도 많았죠. 이런 그에게 스승이었던 파벨 게르트(Pavel Gerdt)는 신체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하는 것을 흉내 내지 말고, 안나만이 가진 우아함과 여림을 특별함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을 했는데요. 이후로, 안나 파블로바는 그만이 선보일 수 있는 자신만의 발레를 하게 되었어요.
자신에게 걸맞은 옷을 입자 더 이상 그의 신체적 한계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그는 자신만이 가진 우아함과 극적인 표현력으로 관객들을 온전히 작품에 빠져들게 만들었죠. 특히, 인물의 감정표현이 중요한 ‘지젤’은 그만의 섬세한 표현이 돋보였던 작품이에요. 안나 파블로바는 입단한 지 7년 만에 황실 발레단에서 가장 높은 프리마 발레리나 위치에 오르며 러시아를 넘어 유럽 전역에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짧은 걸작 ‘빈사의 백조’
어느 날, 안나 파블로바는 친구였던 미하일 포킨(Michel Fokin, 1880~1941)을 찾아가 오직 자신만을 위한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어요. 미하일 포킨은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에 안무를 만들어 안나 파블로바를 위해 작품을 만들었는데요. 바로 ‘빈사의 백조(The dying swan)’입니다. 죽어가는 백조의 우아한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당시 화려한 발레 기교나 군무를 선보이던 기존의 클래식 작품들과는 다르게, 무용수의 연기와 섬세한 표현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에요. 그의 우아한 손놀림과 처절한 발놀림의 대비는 백조의 죽음을 더욱 비극적으로 느끼게 하는데요. 얼마나 처연한 느낌을 잘 살렸던지, 2분간의 이 짧은 작품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어요.

발레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한 여정
이후, 안나 파블로바는 러시아를 벗어나 유럽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어요. 그는 전 세계 관객들에게 발레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신념을 갖고 있었어요. 러시아의 황실 발레단이라는 전통적인 구조에서 벗어나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수많은 관객을 만났는데요. 유럽 관객들에 뜨거운 박수갈채 속에서 그는 새로운 목표를 느끼게 되었고, 디아길레프가 창단한 발레 뤼스에 합류하여 본격적으로 세계투어를 시작했어요.
발레 뤼스에서 활동을 이어오던 파블로바는 1911년 그가 직접 발레단을 창단해 순회공연을 시작했어요. 러시아의 무용수와 유럽의 다양한 무용수들과 함께, 유럽을 넘어 미국, 인도, 일본, 중국까지 방문하여 발레 대중화에 앞장섰어요. 비행기가 없었던 그 시절, 15년 동안 그의 발레단이 순회 한 횟수는 무려 4천 회에 이른다고 합니다. 쉬는 날에는 젊은 발레 학도를 양성하는데 힘썼고요. 그의 발레 인생엔 쉼표가 없었던 셈이죠.

런던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 공연을 앞두고 있었던 어느 날, 추위 속에서도 일정을 강행하던 그는 병을 앓게 되었어요. 의사는 그에게 수술과 함께 다시는 발레를 하지 말 것을 권고했지만 안나는 ‘춤을 추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수술을 거부한 채 일정을 강행했고,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의 나이 50세, ‘빈사의 백조’ 의상을 품에 꼭 안은 채였죠.

전설과도 같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이름, ‘안나 파블로바’. 그는 인생을 오롯이 발레에 바친 인물이에요. 또, 그는 ‘멈추지 말고 한 가지 목표에 매진하라, 그것이 성공의 비밀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지는데요. 안나 파블로바는 신체적 단점과 한계가 있었지만 끊임 없이 발레리나의 꿈을 꾸었고,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내었죠. 스타 발레리나가 된 후에도 꿈을 향한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어요. 발레의 대중화를 꿈꾸며 유럽 전역을 돌며 공연을 했고, 당시 발레가 정착되지 않았던 미국과 영국에서 역시 작은 무대조차 거부하지 않고 발레를 선보였습니다. 죽는 그 순간조차 발레 의상을 품고 있었으니, 발레를 향한 또 다른 꿈을 꾸며 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닐까요.
류한울·조주연 공동 작성
ㅇ 참고자료
- 김순정. 『김순정의 발레 인사이트』, 서울: 씨네스트, 2020.
- 노승림. 『예술의 사생활 : 비참과 우아』, 서울: 마티, 2017.
- 배소심·김영아. 『세계무용사』, 서울:혜민북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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