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화려한 아름다움, 아르누보와 알폰스 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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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의 대표작 Zodiac. 1897, 출처: 위키피디아
 알폰스 무하의 대표작 Summer. 1896, 출처:  widipedia

 

  위의 두 그림은 알폰스 무하의 대표 작품으로 ‘아르누보’형식의 그림입니다.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여인, 물 흐르는 듯 부드러운 의상과 머릿결,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와 비잔틴의 모자이크. 자연주의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에 이끌려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인데요. 아르누보는 선과 면, 색을 강조하고, 꽃과 덩굴, 물결 등 자연의 형태를 가져와 극한의 아름다움을 추구했습니다. ‘어? 어디에선가 많이 봤던 그림인데?’라고 생각하고 계신 분들이 있나요? 그곳이 어디인지는 이 글의 끝에서 얘기해 보기로 하고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미술사조’로 손꼽히는, ‘아르누보’와 이를 대표하는 예술가 ‘알폰스 무하’의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요.

 

 

아르누보의 탄생

  1848년, 영국의 유명 미술학교인 ‘로열아카데미(Royal Academy of Arts)’는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적인 화가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의 그림을 전통 미술의 기준으로 삼아 반복적인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어요. 젊은 학생들 일부가 이런 미술계의 매너리즘에 반발하여, 르네상스 이전의 소박하고 자연적인 소재의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어요. 즉, 라파엘로가 없던 이전 시대의 미술을 추구하는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집단이 생겨난 것이죠.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노력은 당시의 지배적 미술 사조였던 ‘인상주의’에 밀려 1950년대 중반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라파엘전파의 개념은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그 영향을 받은 영국의 디자이너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는 당시 산업사회에서 대량생산되던 조잡한 제품과 차별화되는 수공예 작품을 만들기로 했어요. 이러한 움직임을 ‘미술공예운동(Art and Craft movement)’라고 하는데요. ‘미술공예운동’은 수공 제작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에 기계 생산을 배제하는 등 시대 역행적인 모순을 빚었어요. 하지만 올바른 재료와 공작으로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든다는 근대적 조형 이념은 당시의 대량 생산 방식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었고, 이는 후에 산업디자인의 근간이 되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라파엘전파’와 ‘미술공예운동’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새로운 예술 형태가 바로 ‘아르누보’입니다.

 

라파엘 전파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 Ophelia. 1851-1852. 출처: widipedia
미술공예운동을 이끈 윌리엄 모리스의 벽지도안. 1862. 출처: widipedia

 

 

아르누보와 알폰스 무하

   ‘새로운 예술’이라는 의미의 ‘아르누보(Art Nouveau)’는 1890년에서 1910년 사이 유럽 각지와 미국, 남미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으로 유행했어요. 섬세한 꽃무늬와 반복적인 패턴 등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이 미술사조는, 기존 예술을 거부하고 모든 분야에서 새롭고 통일적인 양식을 추구하고자 한 미술가들의 도전이기도 했답니다.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예술가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 1860-1939)’가 있죠.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아르누보의 거장으로 사랑받았던 것은 아니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무하는 1888년, 성공의 꿈을 안고 예술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로 왔는데요. 하지만 파리의 예술계는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어요. 곳곳에 ‘알폰스 무하’만큼 그림을 잘 그리는 예술가들이 즐비했고, 무하는 고된 무명의 시간을 보내야 했죠. 그는 생계를 위하여 잡지와 패션저널의 삽화, 장식 디자인 등의 작업 의뢰를 받았고, 인쇄소 공장에서 디자이너 보조로 일하기도 했어요. 그러던 1894년 크리스마스이브, ‘알폰스 무하’의 인생을 뒤바꿀 일이 벌어졌어요. 당시 파리 최고의 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지스몽다(Gismonda)>의 포스터를 그려줄 사람을 급히 구하고 있었는데, 워낙 바쁜 시즌이라 이 작업이 가능한 사람이 무하뿐이었던 것입니다. 알폰스 무하는 이 기적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어요.

그는 르네상스 극장으로 달려가 베르나르를 소묘하고, 포스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지스몽다>의 포스터는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양식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본 베르나르는 무척 기뻐했다고 해요. 1895년 1월, 무하의 포스터가 파리의 선전탑에 붙자 엄청난 파장이 일었어요. 폭이 좁고 긴 장방형의 종이에 그려진 실물 크기의 여배우의 모습은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만들었고, 파스텔 톤의 색채와 명암, 비잔틴 장식 효과는 파리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죠. 알폰스 무하의 새로운 그림에 반한 사람들은 이 포스터를 떼어가기 일쑤였고, 연극 <지스몽다> 또한 큰 성공을 거두었어요. 이 엄청난 성공으로 무하는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베르나르’와 6년의 전속 계약을 맺으며, 당대 최고의 상업화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지스몽디의 포스터. 알폰스 무하. 1894. 출처: widipedia
지스몽디의 의상을 입고있는 ‘사라 베르나르’. 출처: widipedia


  이후 무하는 각종 포스터와 공예품들을 제작하며 이름을 날렸는데요. 그 인기가 엄청났어요. 성실 근면하고 작업 속도가 빨랐지만, 밀려드는 주문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해요. ‘베르나르를 위한 9장의 포스터’와 초콜릿, 주류, 제약회사의 포스터, 그리고 알폰스 무하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황도 12궁’이 그려진 달력까지... 알폰스 무하는 아르누보의 전성기를 일구었고, 당대 가장 영향력이 있는 화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극한의 미를 추구했던 아르누보는 20세기 ‘모더니즘’ 양식의 발생으로 짧은 전성기를 마치게 되었죠.

 

 

현대에도 사랑받는 알폰스 무하

  아르누보는 19세기 신고전주의와 20세기 모더니즘 사이, 당대 예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던 미술 사조였어요. 알폰스 무하의 뚝심이 없었다면, 이 짧고도 화려했던 아르누보의 존재는 묻혀버리고 말았을 거예요. 우리는 아직도 일상 곳곳에서 아르누보 그림들을 볼 수 있는데요. 많은 분들이 언뜻 아르누보를 접해보셨을 그곳. 여러분, 이제 기억이 나셨나요? 바로, 타로카드입니다. 대부분의 타로카드가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 스타일을 계승하고 있고, 많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은 상품을 내놓으며 아르누보에 대한 사랑을 이어가고 있어요. 타로카드 외에도, 아르누보를 이용한 다양한 제품들이 만들어지고 있고요. 짧았지만 결코 짧지 않은, 예술의 생명력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참고자료
 - 김동섭. 산업화시대에서의 아르누보의 선구적 역할과 한계. 한국공간디자인학회논문집. 2007
 - 양재천. Alphonse Mucha의 조형세계에 대한 연구 –19세기말 포스터 작품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1997
 - 캐롤 스트릭랜드. 『클릭, 서양미술사』, 예경,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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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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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아르누보 #알폰스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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