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두 천재의 대결, 다 빈치 VS 미켈란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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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강.두.천.’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2018년도 즈음부터 온라인에서 유행한 신조어로,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의 줄임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16세기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도 ‘자.강.두.천.’으로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두 거장이 있었습니다. 바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두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인데요.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미 수없이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죠. 오늘은 두 천재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펼쳤던 세기의 대결을 소개할 텐데요. 이 뜨거웠던 대결의 승자는 과연 누구였을지, 궁금하시죠?

 

레오나르도의 자화상. 1510. 이탈리아 토리노 왕립 도서관 소장. 출처: widipedia
미켈란젤로의 초상화. 1545. 다니엘레 다 볼테라. 출처: widipedia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먼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에 대해 소개해 볼까요. 그는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스승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를 만나 예술세계에 입문했어요. 베로키오 또한 미술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예술가였죠. 다 빈치는 이 훌륭한 예술가의 공방에 들어가 수업을 받았고, 스승의 인정과 존중을 받았습니다. 젊은 제자의 재능을 알아 본 베로키오는 다 빈치에게 회화를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 몰두하기로 결심했을 정도로 제자의 재능을 높이 샀다고 해요. 1472년 수업을 마친 다 빈치는 피렌체 화가 조합해 등록한 뒤 정식 화가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석죽의 성모>, <수태고지> 등으로 인지도를 쌓은 그는, 1481년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어 이 시기에 <암굴의 성모>와 <최후의 만찬>을 그렸는데요. 이 작품들은 그를 세계적인 거장으로 거듭나게 만들어주었죠. 그는 미술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예술가였습니다.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건축, 음악 등의 예술 전반과 과학과 문학, 해부학, 천문학 등의 다방면에서 발자취를 남겨, 2007년 ‘네이처 지’에서 선정한 ‘인류역사를 바꾼 10명의 천재’ 리스트에 올랐어요. 뿐만 아니라, 그 중 가장 창의적인 인물 1위에 선정 되었고요. 이렇게 모두가 인정하는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도 대적할만한 라이벌이 있었을까요?

암굴의 성모. 1483-1493. 레오나르도 다 빈치. 출처: widipedia
최후의 만찬. 1492-1498. 레오나르도 다 빈치. 출처: widipedia

 

야심찬 어린 천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많은 사람들은 그의 강력한 라이벌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를 꼽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다 빈치가 이미 화가로써 입지를 다지고 있을 때에 태어났어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덕에 이를 알아본 메디치 가문의 지지를 얻어 화가 ‘도메니코’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이때가 그의 나의 열셋이었는데요. 이후 스물셋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하는 성모의 모습을 표현한 <피에타>를 조각하여 큰 명성을 얻게 되었죠. 연이어 <다비드 상>을 제작하며 ‘어린 천재’의 이미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이 시기의 미켈란젤로는 이미 미술계의 대 선배이자, 거장으로 존경받는 다 빈치를 경쟁자로 삼고, 그를 뛰어넘기 위해 열정을 불태웠다고 해요.

 

피에타. 1498-1499.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출처: widipedia
다비드. 1504.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출처: widipedia


  ‘야심찬 어린 천재’에 대한 소문은 대 선배의 귀에도 들어갔겠지요. 두 사람은 23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천재성을 견제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해요. 다 빈치는 선배인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미켈란젤로를 ‘성격이 나쁜 젊은 천재’라고 생각했고, 미켈란젤로는 다 빈치를 ‘후배에게 관대하지 못한 나이 많은 천재’로 여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불꽃이 튀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은연중에 서로의 작품을 스케치하고, 스타일을 흉내 내보는 등 서로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503년경, 드디어 두 천재가 우위를 다툴 ‘대결의 장’이 마련되었어요! 피렌체 정부의 대회의장을 꾸미는 대규모 벽화 프로젝트에서 서로 맞은편의 벽화를 그리게 된 것입니다. 그림의 주제는 피렌체의 역사상 중요한 전투 장면을 그리는 것이었어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앙기아리 전투>를,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를 그리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기의 대결에 세간의 관심이 너무 지나쳤나 봅니다. 하기야, 서로를 ‘천재’로 인정할 정도로 상대방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또 다른 천재를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은 상상 그 이상이었을 거예요. 두 거장은 서로의 작품에 대해 비판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대결의 시점은 차일피일 미뤄졌어요. 특히 기존의 프레스코 재료를 대신해 유화를 사용하는 새 기법에 도전했던 다 빈치의 작품은 재료의 문제로 벽화가 빠르게 손상되었고요. 미켈란젤로 또한 완벽주의 성격으로 인해 드로잉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러던 도중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떠나게 되었고, 이어 다 빈치도 루이 12세의 궁정화가를 맡게 되었죠. 결국, 이 대결은 사실상 중단되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미완성의 그림과 함께, 그들의 대결도 그렇게 남겨지게 된 것이죠.  

 

그림 7 앙기아리 전투. 1505의 사본. 루벤스. 출처: widipedia
그림 8 카시나 전투. 사본. 바스티아노 다 상갈로. 출처: widipedia


  결말이 쏙 빠진 ‘자.강.두.천.’이라니.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했던 빵빵하게 부푼 풍선이 갑자기 피식- 하고 바람이 빠져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시죠? 여러분들 중에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릴 수 있는 거냐고, 잔뜩 골이 나신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우리처럼, 당시 이 대결의 결말을 기대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은 또 얼마나 컸을까요. 하지만, 이 두 천재의 대결이 성사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상상을 해 볼 수 있어요. ‘과연 누가 승자가 되었을까?’하는 것인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죠. 하지만 오늘은 우리가 이 두 천재의 그림을 감히 저울질해 보는 호사를 누려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참고자료
 - 김광우.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미술문화, 2016.10.17
 - 캐롤 스트릭랜드. 『클릭, 서양미술사』, 예경, 2013
 - 참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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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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