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을 가진 빨간색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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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지인으로부터 ‘양면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아마, 듣기 좋은 말은 아닐 거예요. 실망감이 들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력해왔다면요. 알고 보면, 인간의 양면성은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스러운 심리라고 해요. 색에도 늘 양면적인 성격이 존재해왔어요. 가장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초록색도 자연, 변영의 의미만 있는 것 같지만 질투, 탐욕의 뜻도 가지고 있고요. 깨끗하고 청결한 이미지의 흰색도 나약함과 결핍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여러 색 중에서도 빨간색은 이런 양면적인 이미지를, 그것도 아주 극과극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색입니다.
빨간색에 대한 불편한 미신
우리에겐 빨간색에 대한 ‘불편한 미신’이 있죠. 그 기원을 찾아 몇 가지의 설을 찾아보았습니다. 먼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빨간색을 참 좋아해왔어요. 이는 빨간색이 복을 주는 귀한 색이라는 믿음 때문인데요. 빨간색을 너무나 사랑했던 진시황은 빨간색이 가져다주는 복을 혼자만 누리기로 결심했어요. 그래서 일반 백성이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황제를 능멸했다는 죄를 물어 모조리 사형에 처했죠. 이 일은 이웃나라였던 우리에게도 전해졌고, 그 영향으로 빨간색 이름을 꺼리게 되었다는 설입니다. 우리의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이 반정을 꾸미면서 살생부(殺生簿)를 적었다고 해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살리기로(生), 반대파는 죽이기로(殺) 한 것이에요. 이때 처단할 사람의 이름을 모두 빨간색으로 적었었고, 그들은 전부 숙청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녔죠. 6.25전쟁 때에는, 전쟁 중에 사망한 병사의 이름을 빨간색 줄로 그어 표시했습니다. 전사자의 사망 통지서를 작성할 때도 빨간색으로 이름을 썼고요. 때문에 ‘빨간색 이름은 사망자의 이름’이라는 인식이 생겨 아직까지도 꺼려지는 색으로 남아있습니다.
*계유정난: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 인 · 김종서 등 수십 명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


동서양을 넘나드는 빨강의 반전 매력
이처럼 다양한 사건과 인물들이 ‘빨간색 미신’과 얽혀있는데요. 하지만 빨간색이 늘 무시무시한 공포의 색만은 아니었어요. 사실 과거에는 우리도 중국처럼 빨간색을 귀하고 신성한 색으로 여겼거든요. 그 일례로, 조선시대 임금의 복장을 들 수 있어요. 아래 그림, 세조의 어진에서 볼 수 있듯, 조선의 왕들은 붉은 비단으로 된 옷에 금실로 수를 놓은 곤룡포를 입었죠. 이때의 빨간색은 강한 생명력과 권력을 뜻합니다. 이는 빨간색이 나쁜 것은 쫓아내주는 색이라고 여기는 믿음 때문이에요. 전통 혼례에서 신부가 양 볼에 연지곤지를 찍는 것이나, 동짓날 붉은 팥죽을 먹는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볼 수 있어요.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복과 재물을 가져다주고, 액운을 물리칠 수 있게 해주는 빨간색을 귀히 여겼답니다.


죽음의 색과 귀한 색을 넘나드는 빨간색의 양면성은,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민족을 색채로 분류했는데요. 하얀색은 지중해 인종, 검정색은 흑인종, 노란색은 아시아 인종, 빨간색은 이집트 인종으로 분류했죠. 가장 귀한 색이라고 판단한 빨간색을 자신의 민족에게 부여한 것이에요. 이집트의 강렬한 태양처럼, 빨간색은 강인함을 상징했던 것일까요? 이집트(Lower Egypt)의 왕인 파라오도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빨간 왕관을 썼답니다. 반면, 나쁘고 사악한 악령을 빨간색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빨간색은 이집트인 그 자체이자 권위를 상징하는 색이었고, 동시에 사악하고 나쁜 색이었던 것이죠.
고대 로마에서는 어땠을까요? 기원전에는 전쟁과 승리의 신인 ‘마르스’를 대표하는 색이었고요. 힘과 권력, 용기를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분노와 전쟁 같은 부정적 의미를 가지기도 했어요. 기원후에는 ‘불과 피’를 상징하는 색이 됐어요. ‘불’과 ‘피’만큼 드라마틱 하게 극단적인 양면의 의미를 갖는 단어가 또 있을까요. 불은 새 생명을 주는 성령임과 동시에, 불태우고 파괴하는 악마의 상징이기도 하고요. 피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구원을 뜻하면서 한편으로는, 더러운 욕망을 상징했어요. 이처럼 빨간색은 구원과 타락이라는 두 얼굴을 하고 당대 사람들의 인식 속에 강렬하게 존재했습니다.


중세 시대, 빨간색의 의미는 여전히 극과 극을 넘나들었어요. 당시 빨간색은 권력과 전쟁을 대표하며 남성의 색이 되었죠. 당시 빨간 염료는 케르메스(연지벌레)에서 추출했는데요. 생산과정이 복잡하고 비쌌지만, 색감이 화려해 영주들의 사치스러움을 표현하기에 적합했죠. 화려하고 빛나는 빨간색은 그야말로 권력의 징표가 되었고, 이는 흰색 의복을 입던 교황과 추기경들에게도 전해졌어요. 많은 성직자들이 교회의 권력을 나타냄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를 바칠 준비가 되었다는 뜻으로 붉은 의복을 입었어요. 하지만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키면서 붉은색은 부패한 권력의 상징이 되어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많은 권력층 남성들이 빨간색 옷을 기피하면서 상반된 푸른 계열의 옷을 입기 시작했어요. 이 틈을 타 가톨릭계 여성들을 중심으로 빨간색 옷이 유행하게 되었죠. 또한 빨간색은 아름답고 화려한 색감 덕분에,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을 기념하기 위한 웨딩드레스의 색으로 선택되기도 했는어요. 반면, 매춘부들에게 빨간 천을 걸치도록 해 그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했죠. 남성을 의미하던 색이 여성의 색으로, 교회의 권력과 복종을 의미하던 색은 부패의 상징으로, 웨딩드레스의 색이 매춘을 뜻하는 색으로. 세상 일은 참, 모를 일입니다.



빨간색은 시대 흐름을 타고 상반된 이미지로 바뀌기도 하고, 아예 전혀 다른 두 이미지를 동시에 갖기도 했어요. 오늘날 한국인에게 빨강은 ‘영원한 젊음’을 상징한다면서 또한 ‘죽음’을 의미하고, ‘접근 금지’라더니 ‘시선’은 또 끌고 싶어 합니다. 이 얄궂은 빨간색의 양면성은, 빨강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색으로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색과 사람의 심리는 연관이 깊다고 해요. 빨간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하거나, 불만이 많은 사람이라는데요. 빨강이 나타내는 심리도 서로 아주 다르죠? 빨강을 좋아하는 여러분은, 어느 쪽이세요? 어쩌면 당연하게도, 두 가지 다는 아닐까요.
문헌자료
- 미셸 파스투로, 『색의 인문학』, 미술문화, 2020
- 박현일, 『색채 인문학 (24)빨간색과 고대-1』, 전남일보,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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