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빛을 그린 화가 ‘클로드 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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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1926)’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라 일컬어져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그처럼 매해 작품전이 열릴 정도로 대중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화가는 많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모네’에 열광할까요? 모네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낸 그만의 ‘빛’과 ‘감각’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빛’으로 드러내고 자신만의 ‘감각’을 더한 모네의 작품들은 실생활을 그려내며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죠. ‘빛을 그리는 화가’, 모네의 그림 속 그 ‘빛’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삶은 곧 예술이라 하던데요. 그의 삶도 과연, 따뜻한 빛으로 가득했을까요?

클로드 모네, 펠릭스 나다르(Félix Nadar)가 1899년에 찍은 사진 
파라솔을 든 여인 ⓒOscar-Claude Monet 1875

 

 

풍자만화가에서 화가의 길로

  모네는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의 어린 시절은 방황과 혼란의 연속이었어요. 1857년경에는 학업을 완전히 포기하기 직전일 정도로 학교생활을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데생 수업만큼은 착실히 들을 정도로 미술에는 관심이 많았는데요. 모네가 처음 화폭에 담은 대상은 학교 선생님들이었습니다. 다음으론 ‘르 아브르(Le Havre)’의 거리에서 관찰한 부르주아들에게 시선을 돌렸는데요. 모네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풍자화로 상당한 유명세를 얻게 되었죠. 노동자의 일당이 5프랑 정도였던 당시에, 모네의 풍자화가 한 점에 10프랑에서 20프랑 정도였다고 하니 청소년이었던 모네에겐 꽤 넉넉한 일자리였던 셈이죠?

  모네의 재능을 가장 처음 발견한 예술가는 ‘부댕(Eugene Louis Boudin 1824-2898)’이었습니다. 부댕은 ‘그라비에’ 물감 상자의 진열장에 전시된 모네의 캐리커처를 본 뒤, 그의 스승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그렇게 부댕의 제자가 된 모네는 풍경 화가인 스승을 따라다니며 노르망디의 구름들, 하늘, 절벽과 파도를 화폭에 담아내며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모네의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요.

청소년기 모네가 그린 캐리커쳐
모네가 그린 캐리커쳐
모네의 스승 부댕의 대표작 <Harbor at Lormont>

 

 

파리의 화가들

  1859년, 열아홉이 된 모네는 스승의 품을 떠나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그는 당시 가난한 화가들이 선호하던 ‘아카데미 쉬스(Academie Suisse)’에 입학해 다양한 화가 친구들을 사귀고 많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파리에서 요구하던 화풍과 법칙은 그를 금방 지치게 만들었어요. 모네는 결국 ‘르누아르(Pierre August Renoir 1841-1919)’, ‘바질(Frederic Bazille)’등과 함께 아카데미를 나와 ‘퐁텐플로(Fotainbleau)’ 숲에서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1861년 봄. 모네는 불행하게도 제비뽑기를 잘못 뽑아 군 징집 대상이 되었는데요. 상심에 빠진 모네에게 아버지는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모네가 미술을 그만두고 가업을 잇는 다면, 돈을 들여 징집을 면하게 해주겠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모네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아프리카 알제리로 향했어요. 군에 갈지언정, 그림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낯선 타지에서의 군 생활을 시작한 모네. 전쟁터였지만 군에서도 그의 예술세계는 계속되었어요. 노르망디의 물안개에 익숙했던 모네에게 알제리의 강한 태양빛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모네는 선명한 하늘과 강렬한 색채들이 일종의 ‘계시’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그의 예술세계는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파리에서 영향을 받은 당시의 작품 < View at Rouelles, Le Havre 1858>
 모네가 그린 르누아르의 초상화, 1875

 

 

해돋이와 인상주의

  1871년, 복무를 마친 모네는 프랑스로 돌아왔어요. 이후 파리 근교에 위치한 ‘아르장퇴유(Argenteuil)’에 정착한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품들을 그려나갔는데요. 이 시기 모네의 작품에는 참신한 시각과 미묘한 분위기, 강렬한 빛과 물 위에 어른거리는 햇빛의 사실적이면서도 시적인 묘사, 순수한 색채의 하모니 등의 특징들이 가장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렇게 자신만의 색을 갖춘 모네는 1874년, 르누아르, 드가를 비롯한 일류 화가들이 개최한 ‘앙데팡당 전’에 참여해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는데요. 슬프게도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참담, 그 자체였어요. 작품을 본 당시 사람들은 ‘미완성 그림’, ‘날로 먹는 그림’이라고 평했고, 비평가 루이 르루아 또한 ‘스케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했습니다.

  모네의 그림은 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일까요? 이 상황은 당대의 미술 사조를 살펴보면 이해하기가 수월합니다. 모네와 인상파 화가들이 등장하기 전의 미술계는 그림이라는 매체를 역사와 인물, 신화를 보다 정확하게 기록하고 묘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어요. 때문에, 개인의 주관과 감각을 표현하는데 집중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은 어딘가 부족하고 모호한 점이 많은, 낯선 그림들로 여겨졌죠. 당시에는 앙데팡당 전을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라며 조롱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인상파 화가들은 오히려 ‘인상주의자’라는 표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하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모네는 계속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걸작들을 그려나갔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의 냉담한 반응은 꽤 오래 이어졌는데요. 모네는 인상주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좌절감 때문에 한때 죽음을 생각했을 정도로 힘겨운 시절을 보냈다고 해요.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네는 계속해서 자신의 그림을 그려나갔고, 훗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화가로 남게 됩니다.

Impression, Sunrise (Impression, soleil levant), 1872

 

 

빛을 그린 화가

  모네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그의 그림에서와 같이 여유롭고 따스한 빛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버지에게도, 당대 화가들에게도 그는 인정받을 수 없었죠. 심지어 노년에는 백내장 진단을 받아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선고까지 받았어요. 하지만 그 어떤 것에도 모네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끈기와 노력은 모네가 알제리에서 경험했던 태양만큼이나 강렬하게 느껴지는데요. 이는, 모네의 내면에 그의 그림 속 빛보다 더 찬란한 것이 항상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그렇기에 어떤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었겠죠. 지금 여러분의 가슴 속에도 반짝이는 무언가를 품고 계신가요?

Claude Monet, The Water Lilies, 1920–26

 

 

 

 

참고자료
 - 조원재. 『방구석 미술관』, 블랙피쉬, 2018.
 - 김영선. 『끌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작품연구』, 석사학위 논문, 대구대학교 대학원, 2000.
 - 캐롤 스트릭랜드. 『클릭, 서양미술사』, 예경,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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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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