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첫 상륙한 ‘라이선스 뮤지컬’(1960~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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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순간~’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의 강렬하고 돋보적인 Theme 이죠. 백 스테이지로 이동해봅니다. 무대에 나설 의상과 소품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작은 레일로드를 따라 순서를 기다리는 무대장치들도 있고요. 인터컴을 쓰고 분주히 움직이는 스텝들을 지나오니 이번엔 곳곳에 붙어있는 공연 포스터에 눈길이 갑니다. 이름난 배우들을 필두로 공연 기획자가 누구인지, 어디서 건너온 뮤지컬인지, 의외로 깨알 같이 많은 정보들이 담겨 있습니다. 공연 선정부터 배우 섭외, 무대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을 가능 하게 하는 그 바탕엔 ‘저작권’이 있습니다. 저작권은 공연의 성사와 지속 여부, 제작비 규모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저작권에 따른 뮤지컬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뮤지컬은 저작권에 따라 세 종류인, 오리지널 뮤지컬, 국내 창작 뮤지컬, 그리고 라이선스 뮤지컬로 구분되는데요. 오늘은 그 중 국내에 처음 뮤지컬이 도입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던 ‘라이선스 뮤지컬’을 콕 집어, 1990년대까지의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라이선스 뮤지컬이란?
라이선스 뮤지컬이란 해외 원작자에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국내에서 공연을 올리는 뮤지컬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웨스트엔드의 최장기 뮤지컬인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을 한국어로 번안하고, 국내 배우를 캐스팅하여 공연을 올리면 이를 라이선스 뮤지컬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명칭은 공식적으로 2000년대부터 사용되었으며, 그전에는 저작권 개념이 확립되지 않아 번역 뮤지컬이라 불렸습니다.
번역 뮤지컬의 발전
번역 뮤지컬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나라에 뮤지컬이란 장르를 알리고, 뮤지컬 시장의 토대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뮤지컬은 1960년대에 미군과 함께 처음 국내에 상륙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뮤지컬이 이미 대중예술로서 자리 잡은 상황이었죠, 타국에서 고향의 뮤지컬을 그리워하는 미군들을 위해 브로드웨이 여배우의 내한공연이 이뤄졌고, 미국 대학생들의 아마추어 공연, 뮤지컬 영화의 유입까지 이어지며 한국의 뮤지컬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타지의 언어와 낯선 문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뮤지컬이란 장르가 한국인에게 처음부터 친숙했을 리 없습니다. 때문에 국내에서는 뮤지컬을 우리의 형식으로 토착화시키려는 예그린극단의 시도와 더불어, 해외 뮤지컬을 번역해 소개하는 극단들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초의 번역 뮤지컬이 탄생했는데요. 1962년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개막한 <포기와 베스>입니다. 장애를 지닌 걸인 '포기'와 마약에 중독된 '베스'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죠. 이후, 1960년대 민간 극단에서도 번역 뮤지컬 제작을 시도하게 되었고, 1970년대에 많은 뮤지컬 영화들이 유입되면서 뮤지컬은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그린극단은 번역 뮤지컬뿐만 아니라, 창작 뮤지컬까지 제작하면서, 이 두 뮤지컬 모두에 대중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80년대 한국 뮤지컬계를 이끌던 극단
1980년대에는 번역 뮤지컬의 제작 수가 창작 뮤지컬의 두 배를 넘어서며 번역 뮤지컬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민간 극단인 현대극장, 극단 민중·대중·광장이 이 시기를 이끌었는데요. 1976년에 창단한 현대극장은 연극계 최초로 뮤지컬 제작을 시작했고, 첫 뮤지컬 <빠담빠담빠담>의 초연 이후, 번역 뮤지컬 <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를 성공시키면서 <사운드 오브 뮤직>, <에비타>, <레미제라블> 등을 연달아 공연하여 번역 뮤지컬의 대중화에 앞장섰습니다.

같은 시기에 세 개의 극단 민중, 대중, 광장은 열악한 제작 환경의 한계에 맞서 합동으로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1983~)을 제작해 대성공을 이뤘습니다. 초연 때는 피아노 반주 하나만으로 공연을 진행할 정도로 제작 환경이 어려웠다고 하는데요. 이전 뮤지컬들과 달리 연극인 중심으로 공연을 하여 뮤지컬에서도 연기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세 극단은 따로 또 같이 작업하며 각자의 번역 뮤지컬 제작에도 열을 올렸습니다. 극단 민중은 1990년 브로드웨이에서 안무가로 활동했던 에디코완을 섭외하여 <오드리>를 선보이는 등 공연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했고요. 극단 광장은 <코러스 라인>, <레미제라블> 등 좀 더 뮤지컬적인 작품을 올리는데 집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극단 대중은 1990년대 <캣츠>, <넌센스>의 인기에 힘입어 2000년대까지 꾸준히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특히 <넌센스>는 약 7년 6개월 동안 공연을 하며 국내 최장기 뮤지컬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죠.


90년대 뮤지컬을 이끈 신시와 에이콤
이처럼 1990년대의 한국 뮤지컬계는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었는데요. 1987년 세계 저작권 협회 가입과 1996년 베른협약을 맺으면서 ‘저작권’이 본격적으로 대두 되게 됩니다. 뮤지컬 전문 제작사가 생기면서 해외 뮤지컬을 정식으로 들여오는 ‘라이선스 뮤지컬’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죠. 199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번역 뮤지컬을 올린 제작사는 신시와 에이콤이었습니다.
1994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뮤지컬 제작을 시작한 신시 뮤지컬 컴퍼니는 1995년 국내 영화 팬들에게도 익숙한 <그리스 록큰롤>의 제작에 미국인 안무가 엘리 포트를 기용하면서 좀 더 명확히 라이선스 뮤지컬의 제작에 기여했고요.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인 <라이프>를 국내에 소개하는 등 해외 공연을 직접 수입했습니다. 1993년 설립된 에이콤은 80년대에 큰 인기를 누렸던 <아가씨와 건달들>의 정식 라이선스를 획득하여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창작 뮤지컬 제작에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후엔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뮤지컬 시장에 뛰어 들게 되면서, 한국 최초의 정식 라이선스 뮤지컬도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점차 뮤지컬 전문 제작사가 많아지면서 뮤지컬 시장이 본격적으로 상업화되기 시작했죠.


우리가 해외의 유명 뮤지컬 작품들을 한국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이유. 그것도 원작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퀄리티로 말이죠. 바로 라이선스 뮤지컬덕분일 겁니다. 지금 국내에서 해외의 라이선스 작품들이 안정적으로 제작되기까지의 과정에는 초기 뮤지컬 세대들의 노력과 그들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산실이 꽃을 피운 2000년대와 국내 최초의 라이선스 공연의 탄생 스토리는 다음 시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참고자료
- 김성희, “서울시뮤지컬단 연구”, 한국연극사학회, 2003, p.211, 2003
- 김우옥, “뮤지컬 전성기 맞아 전문가 양성 시급하다”, 객석, 1993, p122
- 박병성, “2000년대 라이선스 뮤지컬의 산업화 양상 연구”, 예술전문사과정, 한국예술종합학교, 2015
- 박현주, 임대근, “국내 라이선스 뮤지컬 공연 현황과 특징 분석”, 인문학콘텐츠, p.255-256, 2016.
- 서울예술대학교 디지털 자료관: https://arch.seoularts.ac.kr/
-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 https://www.daart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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