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마지막 숫자가 없듯이, 무한한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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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마지막 숫자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가장 큰, 가장 끝에 오는 숫자 말이에요. 숫자를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들은 100이라거나 99999999억 같은 귀여운 답을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마지막 숫자 같은 건 없음을 알고 있어요. 숫자는 무한하잖아요. 그러니 마지막이 없는 것도 당연하죠. 그리고 마지막이 없는 것은 숫자만이 아니에요. 러시아 작가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소설 <우리들>에서는 숫자의 무한함으로 또 다른 것의 무한함을 이야기하거든요.
😒자유라니, 그렇게 미개할 수가!
‘볼셰비키’를 알고 계시나요?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10월 혁명, ‘볼셰비키 혁명’을 이끌었던 러시아 공산당의 이름이에요. 당시 러시아의 두 사회민주노동당 중 다수에 해당하는 당이었기에 러시아어로 ‘다수파’라는 뜻을 가지고 있죠. 소설 <우리들>의 작가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Yevgeny Zamyatin, 1884~1937) 또한 볼셰비키와 뜻을 함께했어요. 그는 대학 시절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였고, 일 때문에 영국에 가 있느라 볼셰비키 혁명의 현장에 있지 못한 것을 크게 아쉬워하기도 했죠. 자먀찐은 혁명을 그 누구보다 반겼던 사람 중 하나인데요, 그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권력자가 되면 부패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기라도 한 양, 볼셰비키 또한 권력을 잡기가 무섭게 급격히 병들기 시작했거든요.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침몰해 가는 자신의 나라를 보며 자먀찐은 소설 <우리들>을 써냅니다.
소설 <우리들>은 ‘단일 제국’만이 남은 29세기의 지구를 배경으로 해요.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이곳에서는 이성과 효율만을 추구하죠. 사람들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리며,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정해진 시간표에 맞춰 생활해요. ‘독창적임’은 ‘평등을 깨뜨리는 것’이고, ‘평범함’은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죠. 소설 속 사람들은 이 나라와 독재정권에 아무런 불만이 없어요. 그게 당연하고 옳은 것이라고 믿거든요.
그 존재들은 어쩌면 아직도 자유라고 불리는 미개한 상태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들이 우리가 수학적으로 오류가 없는 행복을 자신들에게 가져다준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의무는 그들을 강제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인공을 포함해, 단일 제국의 국민들이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자유를 빼앗아줌으로써 도와야겠다고 생각할 거예요. 아무런 제한 없이 자유롭다면 수학적 오류를 계속해서 마주해야 할 텐데, 이 얼마나 미개한 일인가요! 하지만 예외는 언제나 존재하죠. 소설 속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이 세상에 마지막 혁명은 없다!
순종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주인공 D-503의 삶은 I-330이라는 여자를 만난 후 크나큰 변화를 맞이해요. I-330에게 애정을 느끼기 시작하며 이성에 어긋나는 감각, 즉 본능에 사로잡히기 시작하거든요. D-503은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죠. 자꾸만 비합리적 결정을 내리고 비이성적 경험을 맞닥뜨려요. 이런 상황에서 D-503은 혁명 세력을 만나게 되고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단일 제국을 세운 혁명이 마지막 혁명이고, 그 이후의 혁명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런 D-503을 설득하기 위해, 혁명 세력은 숫자를 예시로 들어요.
“당신은 수학자죠. 아니, 그 이상이죠. 철학자며 수학자예요. 그러면 이제 제게 마지막 숫자를 불러보세요.”
“그게 무슨 얘기죠? 나… … 나는 이해를 못 하겠어요. 마지막이라니 그게 어떤 숫자죠?”
“음. 마지막의, 가장 높은, 가장 큰 숫자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건 말이 안 돼요. 숫자란 무한한 거예요. 도대체 어떤 마지막 수를 원하는 겁니까?
“당신은 그럼 도대체 어떤 마지막 혁명을 원하는 겁니까? 마지막이란 없어요. 혁명이란 무한한 거예요.”
단일 제국에서 수학이란 완벽한 존재라고 할 수 있어요. 애매모호한 것 없이 확실한 답만을 내놓는 이성의 정점이죠. 그러니 주인공 D-503이 수학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가 신봉하다시피 하는 수학을 통해 생각의 오류를 짚어주자 D-503은 삶 전체를 지탱하던 신념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돼요. D-503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혁명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원조 ‘빅브라더’, ‘은혜로운 분’을 만나보세요
모든 게 통제받는 사회,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죠? 우리에게 더 친근한 소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필명이에요. 본명은 Eric Arthur Blair죠! 1903~1950)의 <1984>를 떠올리셨을지도 모르겠네요. <1984>를 읽지 않았더라도 통제와 감시의 아이콘인 독재자, ‘빅브라더’는 귀에 익을 테고요.
<우리들>은 <1984>, 그리고 올더스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 1894~1963)의 <멋진 신세계>와 함께 디스토피아1) 3대 소설로 불립니다. 세 소설 중 <우리들>이 가장 먼저 쓰여 나머지 두 소설에 영향을 주었죠. 특히 <1984>와 <우리들>이 닮은 부분이 많은데요. 두 소설 모두 극한의 통제와 감시를 하는 독재 정부가 있답니다. <1984>에 ‘빅브라더’가 있다면, <우리들>에는 ‘은혜로운 분’이 있어요.
1) 디스토피아란 가공의 이상적 나라인 유토피아의 반대로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를 의미해요. 픽션의 장르로 사용될 때는 그러한 세계를 배경으로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작품을 뜻한답니다.
또 두 주인공 모두 글로 기록을 남긴다는 재밌는 공통점이 있죠. <우리들>은 소설 자체가 일기 형식으로 서술되고, <1984>는 방 한구석에서 몰래 일기를 쓰죠. 일기는 주인공의 솔직한 내면을 알 수 있는 경로예요. 문학에서 일기가 이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이유인데요. <우리들>과 <1984>에서는 조금 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감시 사회 아래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두 소설에서 일기는 주인공과 독자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위협 요소가 되기도 해요. ‘불온’한 생각이 담긴 일기를 들켰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테니까요.
물론 두 소설에는 차이점도 많이 있어요. 정부에 순응하며 살아가던 남자 주인공이 새로운 여자를 만나 변화를 겪기 시작하는 것은 공통적이지만, 여자 등장인물의 역할은 상반된답니다. 두 여자의 차이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만나는 반전, 그리고 결말에까지 영향을 미쳐요. <우리들>에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반전이라면, <1984>에는 그 무언가가 없어서 반전이거든요. 이 반전들로 인해 이야기의 끝에서 희망을 가져도 될지 말지가 결정 나는 듯해요. 소설 두 권을 모두 읽는다면 서로 다른 캐릭터가 비슷한 변화를 불러오고, 또 다른 결과를 낳는 것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Editor’s Comment
책 <우리들>은 출판 당시 굴곡진 과정을 겪었어요. 자먀찐과 그의 모험적인 작품들은 혁명 초기부터 정부와 문인들의 눈총을 받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독재 사회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우리들>은 더욱 심한 비난을 받을 게 뻔했죠. 그래서 이 작품은 영어와 체코어, 불어로 먼저 출판됐고, 러시아어본은 3년 후에야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그마저도 많은 수정을 거쳐야 했고, 이후 자먀찐은 낙인이 찍혀 러시아에서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죠. 망명을 떠난 프랑스에서 심장마비로 죽는 날까지도 말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먀찐의 혁명이 실패한 것일까요? 절대 아니죠.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이 회자되고, 사회 비판 소설의 전설로 남았잖아요. 자먀찐이 문학을 통해 남긴 목소리는 계속해서 전해지고 힘이 될 거예요. 혁명이란 무한한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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