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두려운 인생 vs 사랑스러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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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의 감정은 다른 사람들의 것과 많이 다를까요? 누군가의 작품을 감상하던 기억을 한번 되살려 봅시다. “와, 어떻게 저런 작품을 만들지?”라는 생각은 해도, “어떻게 저런 감정을 느끼지?”라고 생각했던 적은 거의 없을 거예요. 아무리 독특한 예술가라 할지라도 결국 우리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죠. 유사한 고통을 지난 후, 유사한 기쁨을 누리며, 유사한 사랑을 하니까요. 그렇다면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역시도, 우리와 유사한 감정을 느꼈을까요? 서울미술관은 개관 10주년을 맞아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한국 화가 31명의 감정과 내면세계를 조명했는데요. 우리의 화가들은 각자의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 창작을 지속하고 사랑을 꽃피웠을지, 전시 <두려움일까 사랑일까>로 만나볼게요!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나만의 것이어야 해!

  ‘K-’로 통용되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 전, 우리의 근현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전시 <두려움일까 사랑일까>에서 만날 수 있는 화가는 대부분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태어났어요. 남의 것이 우리 것을 점령하던 시대를 떠안아야 했죠. 중년이 되어서는 또 다른 비극인 한국 전쟁을 겪었고요. 나라는 분열되고, 교육, 정치, 이념 등 모든 것이 불안했을 거예요. 그들은 늘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을 테고요. 시대는 고난을 주었지만, 이중섭(1916~1956), 김환기(1913~1974), 천경자(1924~2015) 등의 화가들은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하고 실험하며 한국의 미술을 그려나갔어요.

 

일제강점기의 탄압 모습 ©전라매일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의 모습 ©위키리스크 한국

 

  이번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이들에게서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바로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며 갖게 된 ‘절박함’의 정서가 묻어난다는 점이죠. 한국의 고유성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라고 할까요. 서양 중심의 미술 사조에서 어떻게 동양의 것을 가지고 갈 것인가, 일본 문화에 귀속될 위기에서 어떻게 한국만의 전통과 멋을 끌어올릴 수 있는가를 고민한 흔적 말이죠. 먼저, 전시관에 입장하자마자 만나볼 수 있는 우리의 화가, 박생광(1904~1985) 화백의 말을 전할게요. 

"역사와 전통을 떠난 민족은 없다. 모든 민족 예술에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 있다.”

  그의 말에서는 민족과 전통, 예술에 대한 신념이 느껴져요. 해방 이후, 일본색이 짙게 담긴 채색화는 배척되었었는데요. 박생광 화백은 기존에 다뤄지지 않았으면서도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아름다움이 담긴 소재로 작품을 그려냈어요.

 

박생광 화백의 <범과 모란> ©뉴스핌

 

  한편 이우환(1936~), 박서보(1931~), 서세옥(1929~2020) 등 국내 원로·중견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그 철학을 작품으로 녹여냈어요. 이들의 예술은 공통적으로 한국의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도 개인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요. 눈으로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해서 한국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죠. 작업의 방식 역시 단순히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뜯어내기’와 ‘메우기’, ‘긁어내기’ 등의 반복적인 행위로 이루어져요. 재료의 종류도 가지각색이고요.

  서세옥 화백은 친일 화가가 장악한 미술계에 반대하며, 수묵화를 바탕으로 한 현대적 동양화를 실험했는데요. 특히 그는 ‘사람’이라는 주제에 집중했어요. 그의 작품 <사람들>을 한번 볼까요? 붓으로 그려낸 반복적 형상이 간결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사람 간의 유대와 역동성이 담겨 있어요. 어깨동무하듯 이어진 사람들의 모습은 얽히고설킨 인간 공동체의 운명을 떠올리게 하고요.
 

서세옥 화백의 <사람들> ©뮤움

 

🙈두렵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화가들이 본인의 생에 보여준 진지함 또한 놀랍습니다. 이들이 인생의 장애물을 다루는 과정엔 늘 ‘그림’이 있었어요. 두려운 상황에 맞닥뜨려도 그림만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화가들. ‘그림’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길래 이들의 시절을 빼곡히도 채웠을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화가, 박수근(1914~1965) 화백은 어릴 적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의 <만종>을 보고 그와 같은 화가가 되기를 꿈꿨어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유학은 포기해야 했고,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이어나갔죠. 그렇게 그는 어머니, 형제, 어린이 등 한국의 서민이 지닌 선함과 진실함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냈어요. 자신처럼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그림으로써 작가와 감상자 모두 위로받기를 원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 ©네이버 미술백과
박수근 화백의 <우물가> ©서울경제

 

  김환기 화백은 강, 산, 달, 구름 등 우리 자연의 모습과 백자 항아리, 목가구 등 전통적 소재의 아름다움을 점과 선, 색으로 표현하는 한국 추상 미술의 거장이에요. 그림을 잘 모르는 분들도 한 번쯤은 들어 본 이름일 텐데요. 처음부터 인정받으며 화가로 승승장구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림을 계속 그려나가는 것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일기에서 드러내기도 했답니다. 뉴욕에 머물던 시절에는 궁핍하고 고단한 일상에 지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가족들에게 보냈고요. 

"자고 새면 붓을 든다. 이 무슨 지독한 형벌인가. 오늘도 자잘한 수채화를 십수 장 그렸다. 이 지독한 형벌이 내 인생에 구원의 길처럼 되어 있으니 죽자 살자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추상 미술의 거장 김환기 화백조차 그의 작업을 ‘지독한 형벌’이라 일컫던 시절이 있었어요. 상상이 되시나요? 그가 이방인으로서, 한국의 화가로서, 팔리지 않는 작품의 주인으로서 견뎌야 했던 괴로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옵니다. 

 

김환기 화백의 과슈집(Gouaches) ©'곰돌이 baby bear'님의 티스토리 ‘즐거운 삶’

 

  이외에도 전시장에서 만난 화가들이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무척이나 묵직했어요. 그림에 대한 진심과 우리 것에 대한 뜨거운 집념이 느껴졌죠. 저 역시 전시를 관람하는 내내, 자기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일 것이란 긍정적 확신을 갖게 되었답니다.

 

💼어느 미술 애호가의 수집 이야기

  놀라운 사실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140점의 작품 대부분이 어느 미술 애호가의 애장품이라는 거예요. 서울미술관 설립자인 안병광 회장이 지난 40년 동안 모았던 그림을 공개한 것이죠. 그는 작품마다 <수집가의 문장>을 남기며 화가와 그들의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어요. 그의 문장들은 전시의 기획 의도와 작품의 의미에 대한 관람객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몰입을 더해주었답니다. 해당 작품이 수집가의 어떤 마음에 의해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는지 드러났죠. 덕분에 공식적인 큐레이팅 해설과는 다른 결로 작품의 묘미를 알 수 있었어요. 또 그가 남긴 문장들을 보면서 그의 미술품 수집 이유도 짐작할 수 있었는데요. 투자나 과시 목적이 아니라, 그림을 정말 사랑해서 작품들을 수집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장마다 작품 하나하나를 깊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녹아 있었거든요. 그의 문장 몇 개를 보여드릴게요!

“처음 유영국 화백의 작품을 수집하고서는 혼자 보는 것만으로도 풍족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작품을 전시장에 걸어 놓고 보니 내가 이런 작품도 소장하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더군요. 많은 사람과 작품을 나눌 때 눈앞의 산이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며, 새로운 산으로 다가온다는 깨달음을 안겨준 순간이었습니다.”

  미술관에 방문해 여러 화가들의 그림을 눈에 담고, 함께 감상을 나누는 순간 역시 수집가 안병광 회장의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에서 ‘풍족한 마음’을 선물 받는 때가 아닌가 싶어요.

“사실 이 작품을 소장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100억이 넘어가는 가격을 듣고 좌절했습니다. … 과연 그 모든 작품을 합친 것만큼의 가치가 있을 것인지, 어쩌면 김환기 화백이 실패라고 했던 것처럼 저 역시 누군가에게는 실패한 선택이라고 평가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수로 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수로 세지 않아도 되는 것만큼 마음의 위로를 주는 것도 없지요. “ 

  수집가 안병광 회장에게 예술이란, 또 예술품의 수집이란 수로 셀 수 없을 만큼의 위로였나 봅니다. 여러분에게 예술은 어떤 존재인가요? 수집가의 문장처럼, 여러분에게도 예술이 그런 존재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두려움일까 사랑일까> 전시장 속 문구 ©안세은 에디터

 

  한국의 화가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한국의 것’과 ‘나만의 것’을 정의하고, 특별함을 더해 나갔어요.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31명의 화가들에게 인생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고도의 작업물에 대한, 명성에 대한, 혹은 무언가 해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집착, 혹은 애증이었을까요?

“그림 그릴 엄두도 안 나고, 그리려고 해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알 길이 없어요. 답답해서 혼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해 온 추상이라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가를 내 나름대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보 후퇴한 거지요.”  - 유영국 화백

“숨이 콱 막힐 듯한 이 방에서 나는 그저 화판에다 추억 속 무언가를 재생시켜보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것이 나에게는 유일한 삶이요, 즐거움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천경자 화백

  이들이 그림을 지속하도록 한 것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예술에 대한, 한국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 희망, 혹은 사랑이었을까요?

“파노라마 사진 같이 과수원의 춘하추동을 그려보고 싶어. 재료는 서양 것이어도 마음은 자꾸 동양화에 다가서는 걸 느끼지.”  -이대원 화백

“내 재산은 오직 ‘자신’뿐이었으나 갈수록 막막한 고생이었다. 이제 이 자신이 똑바로 섰다. 한눈팔지 말고 나는 내 일을 밀고 나가자. 그 길밖에 없다. 이 순간부터 막막한 생각이 무너지고 진실로 희망으로 가득 차다.”  - 김환기 화백

"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세계 속에 올바르게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으로 자처하오.” -이중섭 화백

 

✅솔직 핵심 정리 노트

ㅇ박수갈채드립니다

  • - 작품마다 숨겨진 ‘수집가의 문장’은 이번 전시의 핵심!
  • - 체력 분배에 탁월했던 전시 섹션 분배! 
    - 먼저 ‘그리다’의 섹션에서 한국을 대표한 추상과 구상 위주의 그림을 면밀히 살펴본 후, 어느 정도 속도감을 가지고 ‘바라보다’ 섹션으로 이동해 원로/중견 작가의 단색화 위주의 한국 추상미술을 감상하니 130점의 작품을 무리 없이 관람할 수 있었어요.
  • - 흥선대원군의 별서이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 석파정을 둘러볼 수 있다는 점! 자연 정원이 잘 조성되어 있고, 입장료는 서울미술관 입장 시 무료랍니다.

ㅇ요건 쫌 아쉬운데
- 층고가 조금 낮기 때문에 개방감은 덜했어요. 다만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몰입도는 더 높았답니다.

 

💬Editor’s Comment

  단언컨대 최근 몇 년간 관람한 전시 중 가장 좋았어요. 서울의 다양한 전시관에서 보여주는 외국 화가들의 정서와 이미지에 익숙해졌는지, 저는 되려 한국의 것이 낯설게 느껴졌던 듯해요. 그렇기에 한국 근현대 미술을 통틀어 살펴볼 수 있는 이번 전시가 더욱 신선하고,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게다가 ‘소장품전’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화가의 예술 세계와 개인적 감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주제를 풀어나간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거장들과의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진 기분이랄까요. 두려움과 사랑으로 뒤덮인 내 인생도 잘 살아보아야겠다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답니다. 31명의 화가들이 자기의 것을 어떻게든 표현하고자 했던 집념은, 결국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꼭 예술의 영역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삶에 몰두한 채 꽉 쥐고 있는 무언가를 놓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가는데요. 마치 화가가 작품을 다루듯, 우리는 우리 인생을 잘 다뤄야겠죠. 이렇듯 우리는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의 태도에서도 삶에 대한 영감과 자극을 받곤 합니다. <두려움일까, 사랑일까>는 묻습니다. 우리 화가들이 그림을 대했던 마음은 두려움일까요, 사랑일까요? 저 역시 한 가지 질문하고 싶어요. 여러분의 인생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나요? 두려움인가요, 사랑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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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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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한국미술 #원로작가 #근현대미술 #전통 #서울미술관 #수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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