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간 속 다른 시간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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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같은 시간 속을
남처럼 그렇게 걸으면 돼
나얼의 노래 ‘같은 시간 속의 너’의 한 구절입니다. 흠, 제가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같은 시간 속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연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걸까요? 시간이 측정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개념인 것은 분명하지요. 하지만 우리를 지나쳐 가는 이 시간을 모두가 동일하게 느끼지는 않아요. 너무도 빠르게 스치던 시간이 가끔은 너무 천천히 흐르는 듯이 느껴지기도 해요. 앗, 의문이 더 생겼어요. 시간은 정말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달려오는 걸까요? 우리는 쏟아지는 시간을 우산도 없이 맞을 수밖에 없는 걸까요?
⏳시간, 절대 일직선이 아닌
시간을 감각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요. 이 불명확한 시간의 감각 덕분에 예술가는 시간을 자의적인 체계에 따라 다룰 수 있게 됩니다. 누군가는 음악으로 시간을 이야기하기도 하겠죠. 음악적 구조로 풀어낸 시간의 이야기, 생각만 해도 매력적이지 않나요? 오민 작가는 ‘시간 기반 설치’(Time based installation)라는 자신만의 시스템으로 시간성을 설명합니다. 음악의 구조를 빌려 온 오민의 작품 세계는 피아노와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던 그의 경력과 연결되어요. 피아니스트로서의 경험이 그의 미술 세계와 음악 세계를 연결 짓는 다리로 작용한 것이지요.
음악적 구조와 시간성을 다룬 작품이라…. 아마 이 지점에서 이미 익숙함을 느끼신 분들도 있을 거예요. 네, 오민 작가는 <올해의 작가상 2021>에서 작품 <헤테로포니>로 큰 주목을 받았어요. 작품의 제목인 ‘헤테로포니1)’ 또한 음악 용어인데요,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중첩되는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답니다. 지난해 문화뉴스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헤테로포니>는 한 가지 사건 속에 중첩되는 감각을 깊이 있게 풀어낸 작품임을 알 수 있어요. 나아가 오민 작가는 선형, 비선형적인 시간의 문제를 다루고 싶다고 밝힌 바 있는데요. 이는 2022년 8월, 전시로 구체화되었어요. 바로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에서 말이에요!
1) 헤테로포니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선율이 동시에 연주되는 형태를 이야기해요.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덩어리 같은 시간!
이번 전시는 오로지 두 개의 작품으로만 구성되어 있는데요. 2층에는 <폴디드>가, 3층에는 <포스트-텍스처>가 자리하고 있죠. 오민 작가의 시간성 체계가 집약된 포스트-텍스처를 먼저 알아보는 것이 두 작품의 전반적인 이해를 도와줄 거예요.
“언제부터인가 동시대 음악에서 ‘선’이 들리지 않는다”
오민 작가는 동시대 음악이 덩어리로 감각되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포스트-텍스처 개념을 만들어 냈어요. 포스트-텍스처를 말 그대로 풀이하면 ‘미래의(다음의) 선율’이라는 뜻인데요. 오선지, 음악의 기본으로 자리했던 선적 체계는 무너지고 이를 대신하는 비선형적 덩어리가 나타났다는 의미죠. 이러한 현상은 음악뿐만 아니라 여러 예술 분야와 일상에서도 발견되기도 해요. 간단히 말하자면 오늘날 일상은 단순한 선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을 만큼 서로 얽히고설켜있어 중첩되고 또 동시에는 부유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덩어리적 감각인 포스트-텍스처는 기존의 위계를 벗어난 감각이면서 그렇기 때문에 비관습적이고 비서사적이에요. 작가는 이를 ‘재현하지도 않고 이야기를 만들지도 않으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생각하는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폴디드>에서는 그야말로 하나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시간성을 느낄 수 있어요. 폴디드는 세 개의 채널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세 채널을 모두 감상해야 해요! 56초 단위의 촬영 현장을 담은 영상 16개를 이어 붙이고 반으로 나눈 것인데, 세 개의 영상은 각각 순행하는 시간, 역행하는 시간, 전체 시간을 보여준답니다. ‘Folded’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영상이 반으로 나눠진 것은 시간을 접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이 작품을 처음 마주하는 관람객은 자연스레 영상의 순서나 체계를 찾아보려고 애쓰게 돼요. 하지만 곧 골머리만 앓게 될 뿐이죠. 꼬이거나 엉키는 등 다양하게 편집된 영상을 통해 작품 속 시간은 하나가 아닌 여러 차원의 시간성을 나타내고 있으니까요. 영상에 구현된 다차원적 시간을 현실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새로운 시간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것이 바로 전시를 감상하는 관람자의 시간이 됩니다. 넓은 전시 공간에 오직 세 개 영상만이 재생되고 있기 때문에 관람자만이 감각하는 고유한 시간을 적극적으로 느낄 수 있죠. 텅 빈 전시장에 편하게 주저앉아 오롯이 작품과 홀로 대면하는 경험은 새로운 차원의 시간을 감각할 수 있게 해요. 이러한 구성을 오민 작가는 앞서 이야기한 ‘시간 기반 설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시간 기반 설치는 여러 감각을 자극하면서 그 자체로 ‘덩어리 진’ 경험을 제공하죠. 그리고 그가 제공하는 설치 속에서 우리는 한 명의 예술가로서 새로운 시간을 다룰 수 있게 됩니다.
🙄심오한 전시 제목? 뜯어보면 거대한 세계관
이번에는 전시 제목을 다시 떠올려 볼게요.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제목이 길어서 왠지 낯선 느낌을 받으셨을 것 같아요. 그러나 제목을 짚고 넘어가면 알쏭달쏭한 포스트-텍스처 개념을 더욱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이는 무정부주의자 2) 엠마 골드만(Emma Goldman, 1869~1940)의 말, “춤출 수 없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를 변형한 제목인데요. 춤은 대의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동료의 말을 듣고, 춤을 부정하는 혁명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골드만의 비위계적 태도가 모티프가 된 것이랍니다.
2) 무정부의자(anarchist)는 정치권력이나 공공적 강제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두는 사람을 이야기해요.
오민 작가는 <포스트-텍스처>를 통해 하찮은 것과 하찮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것에 반대하며 어떠한 예술도 대의의 아래에 두지 않겠다고 선언했어요. 그러한 비위계적 사유에 기반한 예술적인 시간 언어가 바로 포스트-텍스처이고요. 그렇다면 그는 왜 춤 대신 하필 ‘노래'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노래’는 기존의 텍스처, 선적 체계로 정리되던 음악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포스트-텍스처는 ‘노래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켜요. 결국 전시의 제목은 선형적 시간의 체계에 맞추어야 한다면,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이죠. 즉 대의를 위해 형식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시간을 시각화하라고 하면, 흔히들 수직선을 먼저 떠올리실 거예요. 우리의 일상은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지만, 우리의 사고는 여전히 선형적인 틀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늘 순서를 찾으려 하고, 과거-현재-미래를 딱딱 규정짓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우리의 환경은 꽤 전부터 비선형적으로 흘러가고 있어요. 순식간에 해당 페이지로 이동시켜주는 하이퍼 링크, 불연속적으로 전환되는 TV 채널, 단발적으로 쏟아지는 소셜 미디어 속 이미지들까지. 작가는 이 시대의 여러 감각들이 하나의 고정된 방향이 아닌 여러 방향으로 운동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27살에는 직장을 구해야 하고, 35살까지는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야 한다. 적어도 50살에는 노후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 있어야 한다.’ 수치화되는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는 이유로 우리는 개인적인 삶을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의 시간이 필요해요. 나의 시간, 여러 차원의 시간을 긍정하기 위한 첫 시도에 포스트-텍스처가 조력자가 되어줄 거예요. 위계의 지배 밖에서, 또 우리가 스스로 그어놓은 제한선의 밖에서 시간을 느껴보지 않으실래요?
✅솔직 핵심 정리 노트
ㅇ박수갈채드립니다
- - 시간 기반 설치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어요.
- - 기존에 전개되어 온 오민 작가의 시간성에 대한 탐구가 결실을 맺은 전시처럼 느껴졌어요.
ㅇ요건 쫌 아쉬운데
- - <폴디드>를 먼저 감상한 후 <포스트-텍스처>를 감상하도록 되어 있는데요. <폴디드>를 감상하기 전, 포스트-텍스처 개념과 관련된 부연 설명이 조금 더 보충되었다면 작품을 더 쉽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요.
💬Editor’s Comment
음악은 시간을 재료로 하는 예술이에요. 포착할 수 없는 음악을 가시화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가사와 제목, 화성이지요. 부차적인 것 없는 음악은 원래부터 덩어리가 아니었을까요? 음악과 미술을 모두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음악적 구조로부터 시작된 오민 작가의 시간 감각은 정말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2018년의 <연습곡>, 2021년의 <헤테로포니>, 이제는 <포스트-텍스처>까지. 그의 시간성 유니버스가 어떻게 변모해 나갈지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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