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천재, 이제 지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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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드라마 <닥터후> 좋아하시는 분?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분명히 이 장면을 기억하실 거예요. 1890년의 반 고흐는 타임머신을 타고 2010년의 파리 오르세 박물관에 오게 되죠. 위 영상은 생전 작품 하나 제대로 팔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가, 자신의 그림과 이를 관람하는 인파로 가득한 박물관의 광경을 보고 감격하는 장면입니다. 이어서 “고흐가 미술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느냐”는 닥터의 질문에, 큐레이터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화가이자 가장 위대한 인물”이란 답을 내놓죠. 감사 인사와 함께 환희의 눈물을 쏟는 고흐를 뒤로 해당 장면은 끝납니다. 저 또한 이 장면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는데요. 반 고흐에 전하는 감사, 위로, 그리고 그가 생전에 받지 못했던 사랑에 대한 보답까지 느껴져 뭉클했답니다. 해당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고흐라는 예술가에 대한 지극한 헌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반 고흐뿐만 아니라 폴 고갱, 에드거 앨런 포 등 생전에는 세간의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유명해진 예술가의 사례가 꽤 많이 존재하죠. 대중은 그들의 극적인 생애에 유독 주목하여 ‘비운의 천재’, ‘비운의 예술가’ 등의 호칭을 붙이기도 하고요.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고요. 저는 오늘 한국의 1세대 조각가 ‘권진규’를 소개해드리려고 해요!
🔍권진규, 왜 ‘비운’의 천재인가?
권진규는 한국 근현대 조각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춘천 태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무사시노 미술대학을 졸업했어요. 일본에서 개인전도 진행한 만큼, 권진규와 그의 작품들은 한국과 더불어 일본 조각사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죠. 그의 작품이 일본 미술 교과서에 수록되어있을 정도랍니다. 미술평론가 최열은 "권진규는 한국을 넘어 20세기 중반 동북아시아 조소예술의 역사를 바꿔놓은 작가”라 평했어요. 그런 그의 이름 앞에 ‘비운의 천재’란 칭호가 붙는 이유는 바로 그가 스스로 삶을 마감했기 때문인데요.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권진규는 동생에게 남긴 유서에 “경숙에게, 향후의 일을 부탁한다. 적지만 이것으로 후처리해 주세요. 화장해 모든 흔적을 지워주세요”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죠. 평소 활발히 교류하던 서울대 교수 박혜일에게는 미리 따로 유서를 전달하여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 오후 6시 거사”라는 짧고 강렬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조카 허경회는 "부인이 없고 사회생활이 원만하지 않았다. 생활고보다는 우울증 등 심리적 원인이 커서 생을 끝낸 것 같다"라고 언급했어요. 이렇게 죽음의 내막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단서와 가족 및 주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정황을 따져보는 게 전부였죠. 사람들은 당시 한국 미술계에 만연했던 차별, 이에 따른 괴로움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며 추측하곤 했어요. 그가 평단의 인정 외에 대중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거론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권진규의 조카 허경회는 올해 출판된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평전 <권진규>에서 ‘비운’, ‘천재’ 따위의 수식어를 모두 떼어내고자 합니다. 그저 ‘벌거벗은 힘’으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자 한 강인한 인간상에 주목하죠. 사람들이 권진규를 떠올릴 때 ‘대중의 인정을 충분히 받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자극적인 이야기에 집중하길 원치 않는 거예요. 비극적으로 죽은 탓에 그의 작품이 지닌 가치와 예술성이 오롯이 전달되지 않았었거든요. 권진규의 가족을 비롯해 각 미술계 관계자들은 비운의 천재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권진규의 작품에 몰두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길을 가며 올곧이 작품 세계를 지켜온 한 예술가의 인생에 ‘비운’ 따위의 이름표를 붙이기보다는, 그 위대함에 박수를 보내주는 게 맞지 않을까요? 닥터가 고흐에게 그랬듯이 말이죠!
👨🎨스타와 대중이 사랑하는 권진규
지금은 권진규도 다른 거장들처럼 대중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어요. 여기에는 방탄소년단 RM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지난 권진규 100주년 기념전 ≪천사의 아틀리에≫에 자신이 소장한 권진규의 조각품 <말>을 대여해줬을 만큼 미술에 진심인 사람이죠. 그는 권진규뿐만 아니라 김환기, 윤형근 등 국내 원로 작가들에 많은 관심을 보여왔는데요. RM이 방문해 사진을 올린 전시에는 팬들이 방문하여 같은 자리에서 인증샷을 찍어 올리곤 해요. 때문에 RM이 다녀가면 방문객 수가 급증하는 현상이 일어난답니다. 더 이상 미술관이 소위 고고하고 세련된 취향을 가진 예술인들만 방문하는 곳이 아니게 된 거죠. 물론 이러한 대중의 관심이 단기적인 현상이 아니라 적극적인 투자로 이어져 미술계의 전반적인 발전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해요. 셀럽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력은 부정적인 측면도 있거든요. 연예인의 영향력으로 특정 작가의 작품 수요가 상승하면 가격이 급격히 오르고, 이는 일부 투자자들의 투기성 구매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아, 권진규의 작품들은 2000년대 내내 연이은 소유권 논란과 경매로 소유자가 계속 바뀌다 지금은 대부분 미술관에 기증된 상태니 걱정 마세요!
권진규와 그의 작품이 최근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편이지만, 그 너머의 작품 세계와 예술성 자체에 좀 더 시선을 주는 것은 어떨까요? 아래의 작품은 권진규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지원의 얼굴>입니다. 이 조각상은 ‘테라코타’라는 기법으로 만들어졌어요. 권진규의 작품 대부분이 다양한 인물, 동물의 형상을 나타낸 테라코타입니다. 테라코타란 이탈리아어로 흙을 굽는다는 뜻이에요. 흙과 물이라는 친환경 자연 재료를 사용해 가마에 구워내는 도자기의 한 종류랍니다. 도자기는 구워내는 가마 온도에 따라 토기, 석기, 도기, 자기로 분류되어요. 이중 가장 낮은 온도인 800~900도에서 구운 것을 토기, 혹은 테라코타라고 부른답니다. 1만 년 전 고대의 부장품이 발견되었을 만큼 쉬이 썩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죠. 때문에 그를 ‘영원을 빚은 조각가’라 부르기도 해요. 가장 자연에 맞닿은 재료를 통해 본질을 추구하면서도 인간 영혼의 알 수 없는 깊이와 내면의 복잡함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아내려 했던 그의 노력이 보이시나요? 권진규는 짧은 인생을 살다 떠났지만, 그가 흙을 빚고 불로 구워 완성한 작품은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결국 그는 작품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되었네요.
🌺아직도 남아있는 너의 향기
진지한 작품관과 심오한 인생으로 인해 그가 멀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권진규가 여전히 가까이서 살아 숨 쉬는 듯한 공간을 방문할 수도 있어요! 현재 시민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그의 생가가 ‘권진규 아틀리에’라는 이름으로 정기 개방되고 있거든요. 이곳은 권진규가 1959년 일본에서 돌아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자 작업실이에요. 서울시 성북구 동선동, 성신여대역 1번 출구로 나와 10분 정도 걸으면 쉽게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요. 아까 소개한 <지원의 얼굴>을 비롯해 많은 테라코타 작품이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졌답니다.
권진규는 이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는데, 가족이 거주하던 살림채 공간은 예술가 입주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공간으로 제공되고 있어요. 그의 혼이 서린 작업실도 구경하고, 도슨트의 설명도 들을 수 있죠. 몇십 년간 멈춰있던 작업실에 왠지 흙냄새가 나는 것 같더라니까요! 인간 권진규의 영혼에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을 준답니다.
권진규 생가는 지난 2004년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됐고, 2006년에는 권진규의 여동생 권경숙의 기증으로 30여 년만에 개방되어 일반인이 방문할 수 있게 되었어요. 기증은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통해 진행됐는데, 내셔널트러스트란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산 기증과 기부를 통해 보존가치가 높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확보하는 시민운동’이랍니다. 무분별한 개발로 위험에 처한 유산을 지켜내는 비영리 민간 운동이죠. 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늘어났지만 이러한 속사정과 어려움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예술은 영원하다고 하지만 이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관심과 투자가 필요한 현실입니다. 만약 권진규 님에게 관심이 생겼다면 이 아틀리에를 방문해 보시는 것 어떨까요? 아마 방문하는 것 자체가 그가 추구했던 영원함을 존중하는 선택일 거예요. 현재 진행 중인 권진규 전시가 따로 없기도 하고요!
💬Editor's Comment
저는 이 글을 쓰며 권진규가 가수 유재하와 어딘가 닮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왠지 모르게 우울한 느낌, 일관적이고 뚜렷한 작품 세계, 다소 일찍 마무리된 생애, 사후에 대중적인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점 등이 그렇죠. 그런데 유재하의 1집이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2위에 오르고, 지금도 여러 후배 가수들의 커버무대로 재소환되는 걸 보면, ‘권진규도 좀 더 사랑받아도 되지 않나?’하고 속으로 생각하게 돼요. 권진규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더 많은 전시, 더 많은 미술관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그가 ‘비운의 천재’가 아닌 ‘영원의 예술가’로 회자되는 날이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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