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정치, 반동분자? 쇼스타코비치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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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무렵 붉은 하늘. 수평선이 보이는 드넓은 바다. 그리고 발맞춰 춤추는 남녀. 어디선가 세 박자의 왈츠가 들려옵니다.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순간인데요. 이 장면에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춤곡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바로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이에요. 쇼스타코비치, 이름만 들으면 낯설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와 아주 가까운 작곡가랍니다. 그는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성공 궤도에 오른 전설적인 음악가예요. 오랫동안 작곡가들의 딜레마였던 9번 교향곡의 저주를 깨버린 사람이기도 하죠. 그런데 소련의 무시무시한 독재자 스탈린의 눈에 띄어 한순간에 반동분자로 낙인찍히고 마는데요. 그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음악과 정치 사이에서 갈등하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1975)의 생애를 같이 살펴볼게요.
💥도발적이고 강렬한 음악!
신랄함, 파격적, 돌발성과 긴장감, 극명한 대비. 이 단어들은 생애 내내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서 활동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잘 표현하고 있어요. 흔히들 알고 있는 다른 음악들과 마찬가지로,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곡들은 그가 살았던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의 삶이 어땠는지 살펴보기 전에,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려드릴게요. K-POP에서 그의 음악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바로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식스센스> 도입부에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 4악장에 쓰인 모티브가 응용되었답니다. 1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도입부이지만, 그의 음악이 어떤 분위기를 띠는지 단번에 알 수 있죠. 그렇다면 그는 어떠한 삶을 살았고, 그 삶이 음악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요?
😤시대를 반영한 음악가
쇼스타코비치는 소련에서 폴란드 출신 이민자 3세로 태어났어요. 9살 무렵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10대 때부터 작곡을 하기 시작했죠. 이후 그는 피아노와 작곡 전공으로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다니게 되는데요. 19세에 교향곡 1번을 작곡해 성공을 거두며 유명 작곡가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4개의 교향곡을 발표하며 소련의 대표 작곡가로 자리매김합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어렸을 적부터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았어요. 2번 교향곡인 <10월 혁명에 바침(1927)>, 3번 교향곡인 <메이데이(1929)> 등에서 이를 알아볼 수 있죠. 또한 사회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회고록에도 자세히 나와 있어요.
나는 10월 혁명 사건의 증인이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페트로그라드에 왔던 날, 핀란드 역 앞에서 그의 연설을 듣던 많은 무리 속에 나도 끼어 있었다. 당시 나는 매우 어린 나이였지만, 그날의 기억만큼은 영원히 내 가슴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잊을 수 없는 날들의 추억이 내가 교향곡을 만드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 -

🎖국민적 영웅, 레닌그라드의 풍경을 음악에 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처참한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독일은 소련을 상대로 레닌그라드를 봉쇄합니다. 이 무자비한 상태는 57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낳으며 900일가량 이어졌죠. 이때 레닌그라드에 머물고 있던 쇼스타코비치는 의용소방대로 참여했어요. 이런 모습이 뉴욕 타임스 표지로 장식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기도 했답니다.
그는 이때의 상황을 배경으로 7번 교향곡을 작곡했어요.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라고도 불리는 곡이죠. 시민들의 투쟁과 고통, 그리고 승리의 함성을 파노라마처럼 표현한 이 곡은 그의 교향곡 중 가장 길이가 길며, 악기 편성도 방대해요. 극한 상황에 처했었던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통해 희망과 투지를 되새겼고, 이는 훗날 승리를 기원하는 대표적인 음악이 됩니다.
전 세계 수많은 도시에서 연주되었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이 마침내 레닌그라드에서 울려 퍼졌다. 그날의 연주는 공연장 안에서만 들린 것이 아니었다. 확성기를 통해 도시 거리에, 운하 너머로, 모래주머니를 쌓아놓은 궁전 멀리까지 전해졌다. 붉은 군대는 음악이 무인 지대를 넘어 독일 병사들이 참호와 포진지에 웅크려 앉은 적진에까지 들리도록 스피커를 설치해놓았다.
-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중
![홍미희의 음악여행 ⑩] “우리를 버티게 하소서”··· 삶의 파랑과 죽음의 절벽 사이에서 만나는 음악 - 월드코리안뉴스](https://www.worldkorean.net/news/photo/202003/36621_55129_414.jpg)
😰위기의 쇼스타코비치
1933년 쇼스타코비치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발표해요. 1934년 초연된 이 오페라는 대성공을 기록하며 유럽과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한 여성의 치정과 폭력, 살인 등을 다루었는데요. 이런 파격적인 설정이 화근이 되어 쇼스타코비치의 인생에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소련은 냉혹한 독재자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8~1953)의 통치 아래 있었던 공산당 국가였거든요. 실제로 스탈린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한 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부합하지 않는 내용과 음악 어법’이라며 비판하기도 했어요.
당시 소련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공산당 관제 신문 <프라우다>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비평문이 게재되었어요.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내용이었죠. 이후 쇼스타코비치의 다른 작품 역시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눈앞에서 없애버리곤 했던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의 장모, 동료 예술가들을 대거 체포하기까지 했고요. 스탈린의 눈 밖에 난 쇼스타코비치는 한순간에 반인민 형식주의자 즉, 반동분자 취급을 받게 됩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쇼스타코비치는 점차 정권 친화적으로 곡의 분위기를 바꿨어요. 러시아 혁명 20주년을 기념해 고전적 형식과 사회주의 사실주의 사조의 <혁명 교향곡> 5번을 발표한 것이죠. 다행히 이 작품은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어요. 이에 따라 쇼스타코비치는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금 애국 영웅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9번을 발표합니다. 사람들, 특히 스탈린은 전쟁의 종결이라는 상황과 맞물려 베토벤 9번 합창 교향곡과 같은 장대한 작품이 탄생할 것이라 기대했어요. 하지만 어떠한 영문인지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의 기대를 무시합니다. 높은 음역대에서 가볍게 연주되는 피콜로의 소리는 웅장함과는 거리가 멀었죠. 이로 인해 쇼스타코비치의 인생에 다시 위기가 찾아오는데요. 당시 소련의 이인자였던 즈다노프(Andrei Alexandrovich Zhdanov, 1896~1948)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은 것이죠. 즈다노프는 다양한 문화 및 예술 영역을 검열했고, 급기야 1948년에는 문화 숙청을 일으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활동했던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 등의 작곡가들도 즈다노프로부터 형식주의자라며 비난받았지만, 이전에도 밉보인 전적이 있어서인지 작곡가 중에서는 단연 쇼스타코비치가 그의 주 타깃이 되었어요. 결국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까지 소련 체제를 선전하는 영화 음악만을 작곡해요. 예술가를 체제 선전 도구로 활용했던 시대에 작곡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죽고 8년 만에 교향곡 제10번을 발표하며 '9번 교향곡의 저주'를 깨게 됩니다. 9번 교향곡의 저주가 무엇이냐고요? 베토벤 이후의 작곡가들은 교향곡을 9개 이상 작곡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하나의 징크스예요. 클래식 음악계에서 자주 회자되는 주제죠. 귀족들이 요구하면 교향곡을 만들었었던 고전주의 시대의 작곡가 하이든은 무려 100여 개의 교향곡을 남겼어요. 모차르트는 41개, 베토벤은 9개를 작곡했고요. 하지만 그 이후에 이름을 알렸던 브람스, 브루크너, 차이콥스키, 말러 등의 작곡가들은 9번 교향곡까지밖에 쓰지 못했답니다. 그러니까 15개의 교향곡을 남긴 쇼스타코비치가 유일하게 9번 교향곡의 저주를 깬 작곡가인 것이죠. 클래식계에서 아홉 번째 교향곡은 ‘음악 인생을 완성하는 대작’이라 볼 수 있습니다. 권력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어두운 시기를 살았음에도 클래식계의 오랜 징크스를 깬 쇼스타코비치! 그가 대단한 음악가라는 사실은 절대 부정하지 못하겠죠?
음악에 시대를 담아낸 진정한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그의 음악은 삶과 조국을 기록한 연대기와도 같아요. 그는 2차 세계 대전과 공산당 체제의 검열을 견디며 예술 활동을 해야 했죠. 사실 쇼스타코비치를 둘러싼 논란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과연 그를 권력에 항복한 겁쟁이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운 위대한 작곡가로 봐야 할까요?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ㅇ참고자료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증언(회고록)」, 1976
- Solomon Volkov, "Testimony :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 Faber:London, 1981
- 객석, “혁명기 러시아의 작곡가들 : SPECIAL”,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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