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소설의 아버지 ‘이광수’의 3가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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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몇 가지 모습으로 살아가나요? 우리는 가족, 애인, 친구, 직장동료 등 타인과 만나고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곤 합니다. 장거리 연애도 거뜬한 사랑꾼. 우리나라 문인들의 우상이었던 소설가. 열정적인 독립운동가에서 변절한 친일파. 이 세 가지 모두가 한 사람의 모습이라고 하면 믿어지시나요? 바로 현대 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광수의 다양한 얼굴입니다. 친일 성향의 행적으로 인해 현재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지만, 사실 근대 문학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해요. 이광수의 세 가지 얼굴, 함께 알아볼까요?
😞평탄할 일 없는 이광수의 삶
이광수는 1892년 중국과 인접해 있는 평안북도에서 태어났어요. 당시 조선은 밖으로는 외세의 위협을, 안으로는 일제의 간섭을 받고 있어 어려운 시기였죠. 이광수의 집안 역시 가세가 기울어 가난했고요.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해 죽을 고비도 숱하게 넘겼죠. 하지만 그는 이미 5세에 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칠 정도로 머리가 좋았어요. 신동으로 소문이 날 정도였답니다. 그러나 청소년기까지 불우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광수가 11세가 되던 해, 부모가 콜레라로 사망하여 누이동생 둘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거든요.
그는 동생들과 함께 외가와 사촌 집을 전전하며 상점 종업원으로 일하는 등 아등바등 살아갔어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으니, 그를 멸시하는 사람들도 많았죠. 상처와 좌절 속에서 힘겹게 살던 중 한 천도교인을 만나게 돼요. 그는 이광수를 딱하게 여겨 위로했고, 이에 이광수는 천도교에 입교합니다. 그 뒤 한 대령의 집에 기숙하면서 문필과 관련된 일을 맡게 되었고, 천도교 단체의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해요. 그때 겨우 중학생의 나이였죠. 그는 홍명희, 최남선과 같은 문학인들과 만나면서 소년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합니다.
그는 졸업 후 조선으로 귀국하여 독립운동가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었어요.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시인 김소월의 담임이기도 했죠. 훗날 교감까지 맡으며 교육에 힘 쏟았고, 퇴직 후에는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자유연애에 눈 뜬 20세기의 인물들!
26살의 유학생이었던 이광수는 일본 한 병원에 실습 차 나와 있던 의대생에게 푹 빠지게 돼요. 병원비를 낼 돈이 없던 이광수를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아픈 그를 위해 약과 함께 하숙집을 방문해 정성스러운 간호까지 했던 그는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인 허영숙! 이들은 곧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연인 사이로 발전했지만, 이광수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어요. 바로 유부남에다 아들까지 있었다는 사실이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헐뜯고 비난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고 뜨거운 사랑을 이어갔어요. 결국 이광수는 첫 부인과 합의 이혼을 하며 허영숙과 결혼을 하기로 약속합니다. 하지만 고아 출신에 아들까지 딸린 이광수를 허영숙의 집에서 순순히 받아줄 리 없었어요. 허영숙은 끈질기게 모친을 설득했지만 그럼에도 허락은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둘은 결혼하지 못해 헤어졌을까요?

오히려 모친의 결사반대는 그들에게 불꽃이 됩니다. 허영숙은 모친의 돈 2천 원을 훔쳐 이광수와 함께 북경으로 도피해요. 오늘날로 따지면 1억 원에 이르는 큰돈이었죠. 1년 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8 독립선언서 작성을 위해 이광수는 도쿄로, 허영숙은 서울로 돌아갑니다. 이광수는 중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본인의 열정적인 모습에 만족했고, 서울에 있는 허영숙에게 편지해 이곳에 살림을 차리자고 했어요. 하지만 허영숙은 당시 조선 여자로서는 최초로 ‘영혜 의원’이라는 병원을 열어 운영하고 있었죠. <동아일보>에 여자 기고자로서 글도 쓰고 있었고요. 이미 서울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중국으로 갈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허영숙은 이광수를 조선으로 귀국시키고자 직접 상하이로 찾아가요. 그런데 임시정부는 허영숙을 일제의 앞잡이, 즉 밀정이라고 판단하고 체포령을 내렸어요. 이광수가 아버지처럼 따르던 안창호까지 그의 귀국을 만류했죠. 오늘날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안창호와 친일 행적 문인으로 알려진 이광수가 긴밀한 사이였다니 신기하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더 자세히 알아볼게요. 이광수는 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1945년, 경기도 양주군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그들은 조선의 해방 소식을 듣게 돼요. 해방 후 친일파에 대한 단죄의 움직임이 일자 허영숙은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그와 이혼했고, 그렇게 그들의 사랑 역시 끝이 나버렸죠.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겐 그들의 연애가 일반 커플들의 연애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여요. 하지만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이광수와 허영숙의 연애는 매우 특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답니다. 당시만 해도 조선은 무척이나 보수적인 사회였기에 연애로 시작하여 결혼한 것보다, 중매로 결혼한 부부가 더 많았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광수는 자유연애에 일찍 눈이 트인 사람이었던 거예요. 그는 자신의 가치관을 주위에 전파시키며 ‘인생의 연애는 예술이요, 남녀 간의 예술은 연애이다.’라며 자유 연애론은 주장하곤 했답니다.
✨문인들의 우상, 계몽주의의 전파자
소설가 이광수는 당시 모든 문인들의 우상이었어요.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고, 현재는 현대 소설의 아버지라고 평가받죠. 그만큼 글솜씨가 대단한 작가랍니다. 그는 <소년의 비애>, <방황>, <단종애사> 등 수많은 대표작을 남겼는데요. 특히 그의 첫 장편소설인 <무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로 간주하는 작품으로서 이광수의 작가적 명성을 굳힌 작품으로 유명해요. 다소 어려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랑과 사회적 가치관에 대한 내용 자체는 지금 읽어도 굉장히 흥미로울 거예요. 상당히 보수적이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폐습, 자유연애, 교육, 민족의식 등 당대성을 그려내며 자신의 사상을 가감 없이 표현했거든요.
그의 이러한 사상은 ‘계몽주의’라는 한 단어로 정리되기도 합니다. 무지한 민중들을 일깨워서 일본과 미국처럼 강해지자는 뜻이죠. 이광수는 소설과 시를 통해 그의 가치관을 한껏 드러냈어요. <무정>뿐만 아니라 <개척자>, <흙>에서도 계몽주의적 가치관을 확인할 수 있고요.
이광수는 해방기 즈음부터 다수의 소설로 자신의 삶을 재현했어요. <나-소년편>, <나-스무 살 고개>, <나의 고백> 등을 통해서 말이죠. 작품에는 첫 번째 아내와의 결혼 관계를 어기고 혼외 관계를 했다는 것과 자신이 근무했던 오산학교에서의 갈등 관계 등이 나타나요. 이러한 그의 행보를 보아온 많은 이들은 친일 성향을 보였던 이광수가 이전과 같이 문학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뉘우칠 거라고 기대했어요. 그와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여겨지던 문인 최남선은 해방 이후 <자열서>라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친일을 반성하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그는 <나의 고백>, <친일파의 변>을 통해 ‘민족주의자 이광수’의 삶에 초점을 맞춰 작품을 완성합니다. 친일을 반민족의 동의어로 설정하지 않고, 오히려 민족주의로 환원하여 기록한 것이죠. 자신의 친일은 결국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는 거예요. 이러한 논리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광수의 친일과 민족주의가 모두 민족의 발전과 개량이라는 근대적 계몽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광수에게 계몽주의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는 아주 중요한 가치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죠.
😰씻을 수 없는 오명, 친일 행적
이광수의 작품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몽주의는 앞서 이야기한 도산 안창호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인데요. 하지만 우리가 안창호를 독립운동가로 기억하고, 이광수는 친일 행적이라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가진 작가로 기억하고 있듯이 이 둘의 가치관은 서로 방향이 달랐어요. 이광수가 발표했던 <민족개조론>은 안창호가 제기했던 민족개조론의 영향을 받아 집필하게 된 것인데요. 이광수로 인해 민족개조론이 상당히 왜곡되었기 때문에, 안창호가 주장하는 민족개조론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구분하고 있죠. (안창호 억울…) 안창호의 민족개조론, 즉 실력양성론은 교육과 산업을 증진시켜 민족을 개조해야 하며, 민족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사회, 국가, 세계까지도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어요. 조선의 독립이 가장 큰 목적이었고요. 하지만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에서는 이 조선 독립, 즉 국제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쏙 빠져버립니다. 직접적으로 내선일체에 순응해야 한다는 말은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 일제가 허용하는 선 안에서 최대한 많은 자치권을 얻어내자는 자치론과 일맥상통하여 비판을 받은 것이죠.
이것만으로는 그를 친일파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겠어요. 일제강점기 초기에 그는 열렬한 독립운동가였으니 그럴 만도 해요. 그는 「2‧8 독립 선언서」로 불리는 「조선청년독립단 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죠.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도 활동했답니다. 하지만 30세가 되던 해부터 이광수는 조금씩 변절의 길로 들어섰어요. 임시정부 내 파벌 간 극심한 갈등을 지켜보며 회의를 느꼈고, 믿고 따랐던 독립운동가들에 실망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에요. 그는 『매일신보』에 실린 <창씨와 나>라는 칼럼을 통해 조선인의 창씨개명을 권고하고, 이후 학병 권유 연설을 하는 등 친일 활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했어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명확한 근거죠. 광복 이후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이광수는 “나는 일본이 이리 쉽게 망할지 몰랐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행동이 권위가 아닌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이에 대한 판단은 모두 다를 것 같네요.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광수는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그런 상처와도 같다. 조선 현대문학사에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지만, 그의 친일로 조선 정신사에 감출 수 없는 흠집을 만든 사람이 이광수이다.”라고 말했어요. ‘최초’라는 타이틀을 여럿 가지며 문학사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기도 하죠. 현대 소설의 기틀을 잡으며 우리나라 현대 소설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이광수. 일제 말기 친일 행위는 비판하더라도 그의 문학은 우리의 자산으로 존중받아야 할 것 같아요. 세 얼굴의 지식인 이광수, 여러분은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ㅇ참고자료
-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1, 2』, 솔, 2001.
- 이민영, 「해방기 이광수와 ‘친일’의 기표」, 현대소설연구 제68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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