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에서도, 이 죽일 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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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프랑스. 당시 프랑스인들은 프랑스혁명, 나폴레옹 전쟁, 산업혁명 등을 겪으면서 삶에 지치고 정신적 폐허에 갇혀 있었는데요.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사람들은 화려하고 환상적인 것에 열광했어요. ‘낭만주의(romanticism)’가 등장한 것이죠. 그 첫 발레 작품은 ‘라 실피드(1832)’였어요. 발끝으로 서는 ‘쉬르 라 포앙트’를 하기 위한 토슈즈와 무릎 아래 기장의 하얀 로맨틱 튜튜가 처음으로 등장해 신비로운 ‘요정’의 이미지를 그려내며 낭만 발레에 불을 지폈는데요. 이후 이 명맥을 이으며 낭만을 열망하던 관객들에게 큰 찬사를 받았던 또 하나의 작품이 탄생했어요. 바로 발레 ‘지젤(1841)’이죠.


지젤, 고전이 되기까지
‘지젤’에는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와 시적인 음악 등, 관객들이 매료될 수밖에 없는 낭만적인 요소들이 가득했는데요. 무엇보다도, 남녀 간의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빠질 수 없겠죠. 한 시골 마을의 평범한 소녀 지젤은, 신분을 숨긴 귀족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져요. 하지만 알브레히트에게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고, 지젤을 짝사랑하고 있었던 사냥꾼 힐라리온에 의해 이 사실이 밝혀져요. 충격을 받은 지젤은 심장바미로 숨을 거두죠. 이제, 지젤은 지나가는 남자들을 유인해 그들이 죽을 때까지 춤만 추게 만드는 ‘윌리’가 됩니다. 그녀의 무덤을 찾은 힐라리온은 윌리들에 의해 목숨을 잃지만, 알브레히트는 지젤 덕분에 목숨을 구하죠. 홀로 남은 알브레히트는 지젤의 깊은 사랑을 뒤늦게 깨달아요.
당시 예술 평론가이자 시인이었던, 테오필 고티에(Jules Pierre Théophile Gautier, 1811~1872)는 발레의 열정적인 팬이었어요. 고티에는 독일의 시인 하이네가 쓴 ‘독일론’을 읽다가, 밤이 되면 분노의 춤을 추는 처녀 귀신 ‘윌리’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는데요. 이에 영감을 받아 발레 작품을 만들기로 했어요. 당대 최고의 발레스타였던 카를로타 그리지(Carlotta Grisi, 1819~1899) 역시 그의 영감의 원천이었는데요. 그는 사실 남몰래 그리지를 흠모하고 있었지만 그녀에겐 이미 연인이 있었어요. 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고티에의 사랑이 ‘지젤’의 대본에 녹여져 있다는 말도 있어요. 이렇게 구상된 ‘지젤’의 대본은 테오필 고티에와 당시 파리오페라극장의 전속으로 있는 작가 베르누아 생 조루주(Jules-Henri Vernoy de Saint-Georges, ?~?)에 의해 공동으로 집필되었어요.


낭만발레의 정수, 지젤
‘지젤’의 음악은 당시 최고의 인기 오페라 작곡가였던 아돌프 아당(Adolphe Adam, 1803~1856)이 맡았어요. 아당은 오페라나 교향시 등의 악곡에서 주로 쓰이는 ‘라이트 모티프(Leitmotiv)’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요. ‘라이트 모티프’는 작품 안에서 특정한 인물이나 상황 등과 연관되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적 선율을 뜻해요. 특정 악구를 어떤 인물이나 사물과 연결시키는 것으로, 발레 작품에서는 ‘지젤’에서 새롭게 시도된 것이에요. 예를 들면, 1막에서 지젤과 알브레히트가 데이지 꽃으로 점을 치는데요. ‘불행’에서 꽃잎은 멈춥니다. 이때 연주되는 곡이, 지젤이 알브레히트의 배신을 알게 되어 미치게 돼버리는 장면에서 다시 한번 연주돼요. 반복되는 선율을 이용해 복선을 숨겨둔 것이죠.

마지막으로, 파리오페라극장의 발레 마스터였던 장 코랄 리의 안무까지 더해져 발레 ‘지젤’이 완성되었어요. 1842년 6월 프랑스 파리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둔 후, 꾸준히 사랑을 받았어요. 그러나 낭만주의 사조에 대한 광풍이 사라지자, ‘지젤’은 빠르게 파리에서 잊혀 갔는데요. 이후 고전발레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리우스 프티파의 손을 거친 ‘지젤’이 다시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낭만발레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어요. 프티파의 안무는 이전과 다른 점이 있었는데요. 1막에서는 지젤의 솔로 춤을 삽입했고, 2막에서는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2인무, 윌리들의 여왕 미르타의 독무와 군무들로 재창작되었어요. 오늘날까지 세계 여러 발레단에서 공연되는 ‘지젤’은 프티파의 재창작된 작품을 바탕으로 이어져 오고 있어요.
‘지젤‘은 2막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1막에서는 지젤과 알브레히트와의 사랑과 배신, 2막에서는 죽어서 윌리가 된 지젤이 알브레히트를 지켜내며 숭고한 사랑을 그리는 내용이에요. 특히, 각 막마다 주요한 관람 포인트가 있는데요. 1막에서는 알브레히트의 배신을 깨닫고 지젤이 미쳐가는 모습을 표현한 ‘메드씬’이에요. 무용수의 몰입과 수준 높은 연기력이 요구되는 장면이자, 발레리나라면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라고 해요. 또, 2막에서는 32명의 무용수들이 펼치는 윌리 군무를 빼놓을 수 없어요. 푸른 달빛이 미치는 무대 위,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펼쳐지는 요정들의 군무는 낭만발레의 정수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꼽혀요.


지젤은 약 200년의 시간 동안 그 어떤 작품보다도 낭만 발레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사랑받아 오고 있어요. 여주인공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안무의 기량을 펼치는 ‘라 실피드’와는 달리, 낭만발레의 특징에 드라마틱한 내용과 무용수들의 내면연기가 더해져 극적 효과가 탁월해요. 긴 튜튜를 입고 펼치는 낭만발레의 군무는 신비롭고 처연한 느낌마저 들죠. 모두가 지쳐버린 시대, 겉으로는 환상적인 것을 쫓으면서도 결국 사람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마음 깊은 곳을 툭 건드릴 수 있는 감정 스위치가 아니었을까요.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바로 그것 말이에요.
류한울·조주연 공동 작성
ㅇ 참고자료
- 이은경. 『발레 이야기』, 열화당, 2019.
- 한지영.『발레 작품의 세계』, 플로어웍스, 2021.
- 김순정. 『김순정의 발레 인사이트』, 씨네스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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