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젤토브, 힘내봐!
- 1,612
- 0
- 글주소
❗ 이 글은 세종문화회관 초청 프레스콜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마젤토브! 제국의 아이들이 부른 역주행의 대명사 노래가 아니냐고요?(그렇다면 여러분은... 저와 동년배시군요.) 마젤토브는 ‘행운을 빈다’는 뜻이 담긴 히브리어인데요. 유대인들이 중요한 행사 혹은 이벤트에서 행복을 위한 축하를 하는데에 사용되곤 합니다. 누군가 나의 앞길을 축복해주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죠. 왠지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여기, 아무리 많은 이들과 ‘마젤토브’를 주고받았어도 매번 들이닥치는 상황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가 있어요. 바로 <지붕위의 바이올린>이 있는 마을, 아나테브카의 한 가장. 테비에입니다.
🙄네? 지붕위의 바이올린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으시겠죠? 사실 ‘지붕위의 바이올린’이란 말 그대로 지붕 위에 바이올린 하나가 우두커니 놓여있다는 말은 아니고요.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인물을 의미해요. 지붕 위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바이올린 소리로 극은 시작됩니다. <지붕위의 바이올린>은 100년도 훨씬 넘은 1905년, 러시아제국의 지배를 받는 우크라이나 지방의 작은 유대인 마을 아나테브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요. 이곳의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전통을 중요시하고 숭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죠. 첫 번째 넘버에서 테비에는 이야기합니다.
“전통! 전통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위태로울 겁니다. 마치 저 지붕위의 바이올린 연주자처럼!”
실제로 높고 좁은 지붕 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연주를 이어가는 바이올린 연주자(이하 피들러)는 상당히 불안해 보입니다. 그가 전통과 현실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 모습은 마치 끊임없이 변화를 겪는 아나테브카의 마을 사람들과 닮아있죠. 피들러라는 캐릭터는 실제로 마을에 존재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와 같은 이유로 마을 사람들을 지켜보고 수호하는 초월적인 존재로서 그려지기도 합니다.

좋아요, 이제 ‘지붕위의 바이올린’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잘 알겠어요. 하지만 아직 한 가지 의문이 더 남아있죠. 하고 많은 악기 중 왜 바이올린이냐 말이에요.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해요. 예로부터 유랑 생활이 잦았던 유대인들에게 무거운 악기보다는 비교적 가볍고 이동성이 좋은 바이올린이 친숙하게 여겨졌기 때문이거든요. 재미있는 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 유대인과 바이올린 사이의 관계성이에요. <지붕위의 바이올린>의 무대는 샤갈의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는데, 샤갈 역시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수많은 작품 속에 바이올린을 남기기도 했거든요. 바이올린은 유대인과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해온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겠죠.

피들러 역할을 맡은 배우는 국내 최초의 집시 바이올리니스트 콘(KoN)인데요. 콘(KoN) 역시 프레스콜 질의응답에서 “피들러라는 존재는 아나테브카 사람들의 얼, 혼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더라도 마을 사람들과 피들러가 상징하는 정신이 살아있다면 어디서든지 다시 희망을 가지고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라고 전해왔어요. 이렇게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마음을 담아 콘(KoN)은 매 공연마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넘버 중 하나를 즉흥적으로 연주한답니다. 이 즉흥연주는 2막 서곡의 중간 부분에 해당돼요. 매일매일 어떤 넘버가 연주될지, 오늘의 연주에는 어떤 감흥이 섞여 있을지 생각해보는 재미도 쏠쏠하겠어요.
🤔100년도 넘은 이야기를 왜 지금...?
<지붕위의 바이올린>은 1964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을 올린 작품이에요. 큰 인기를 끌었던 이 작품은 1971년 영화로 제작되어 1974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었죠. 그리고 서울시뮤지컬단에서는 <지붕위의 바이올린>을 이미 7차례나 공연했어요. 올해는 8번째 재공연이고, 7번째를 맞았던 작년 2021년의 공연은 무려 1998년 이후 23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랍니다. 유명한 고전 작품을 무대에 다시금 올린다는 것은 여러 세대가 한 작품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죠. 더군다나 이 극 역시 가족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왜 2022년에, 왜 하필 지금 100여 년 전 유대인 마을을 조명해야 할까요?

새로이 서울시뮤지컬단 단장에 취임한 김덕희 총괄 프로듀서 역시 공연을 올리기에 앞서 이러한 고민을 했다고 해요. 더욱이 서구권과 달리 동양에서는 유대인 문화에 대한 사전적인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시간적 경계와 문화적 경계, 두 개의 층을 거쳐야 한다는 어려움도 있었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위의 바이올린>은 테비에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사이의 간극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첫 넘버부터 줄곧 전통을 강조하고 고수하는 테비에.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우리는 사실 테비에의 뜻대로 되는 일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돼요.(웃픈 포인트...) 그리고 테비에의 고뇌와 행동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만 하는 유대인들의 지혜와 유연함을 엿볼 수 있죠. 이는 오랜 시간 이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하고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솔직 핵심 정리 노트
ㅇ박수갈채드립니다
- 서울시뮤지컬단이기에 가능한 고전극의 재발견
- 다양한 연령대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섬세한 연기
- 웅장한 소리로 즐기는 민족적인 넘버
ㅇ요건 쫌 아쉬운데
- 보수적이고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는 시대적 배경을 불필요하게 오랜 시간 동안 그린 넘버가 존재해요. 작품이 오래된 것에 비해 보수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해요.
💬Editor’s Comment
시간이 오래 지나도 변하지 않을 가치를 지키는 것. 그리고 그 전통과 변화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법. 테비에와 아나테브카의 마을 사람들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러한 생각들을 던져줍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 어떤 일이 찾아와도, 결국에는 다 괜찮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마젤토브!’하고 인사를 건넸을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로그인하시면
하루예술의 모든 콘텐츠 열람이 가능해집니다!
이야기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