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벽한 블랙을 찾아서, ‘반타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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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보다 더 검은색이 있다?
몇 년 전 모 기업에서 OLED TV를 출시하면서 광고에 이런 카피를 넣었죠. ‘가장 완벽한 블랙, 색상의 완성을 구현하다’ ‘블랙이 다 똑같은 블랙이지, 웬 오두방정이야?’라고 생각했던 분들도 있을 텐데요. 반면, ‘와우!’라는 한 단어로 뉴 테크놀로지를 환영했던 분들도 있을 거예요. 백라이트 앞에 색상을 조합하여 ‘희뿌연 블랙’을 만들었던 기존의 방식에서, 픽셀이 자체적으로 더욱 선명한 검은색을 표현하는 신기술이 탑재된 것이기 때문이었죠. 이렇듯, ‘보다 진하고 완벽한 검정’을 갖고자 하는 욕구는 항상 있어왔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검은색이라 불리는, 반타 블랙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우리가 색을 구분하는 원리
‘반타블랙’이 얼마나 완벽한 검정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색을 인지하는 원리를 설명해 볼게요. 우리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빛의 범위를 ‘가시광선’이라고 하죠. 이 가시광선 안에 흔히 무지개라 부르는 ‘빨주노초파남보’의 컬러 스펙트럼이 있는데요. 이 스펙트럼을 가진 빛 에너지가 ‘사과’라는 물체에 닿아 나머지 색은 모두 흡수하고, 사과 특유의 빨간색을 반사하면 우리의 눈은 ‘빨간 사과’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 원리는 세상 모든 물체에 전부 적용할 수 있는데요. 보라색 포도, 노란색 바나나, 얼룩말의 무늬, 고유의 피부색을 가진 사람까지. 빛의 원리, 정말 신기하죠?
그럼, 검은색과 흰색은요? 빛의 스펙트럼에 없는 이 색들은 어떻게 우리 눈에 보이는 걸까요? 이는 검은색과 흰색이 가진 특성 때문입니다. 검은색은 모든 빛을 흡수하고, 흰색은 모든 빛을 반사하거든요. 하지만 검은색도 자세히 비교해 보면 까만 검은색, 희끄무레한 검은색, 파랑이 섞인 듯한 검은색 등 여러 가지고요. 흰색도 푸르스름한 흰색, 누르스름한 흰색 등 여러 종류가 있어요. 빛의 흡수율과 반사율에 따라 그 감도가 달라지는 것이죠.


반타블랙의 탄생
이제 반타블랙을 등장시켜 볼까요. 반타블랙의 반타(VANTA)는 ‘수직 정렬 나노 튜브 배열 (Vertically Aligned Nano Tube Arrays)’의 약자로 영국의 Surrey Nano systems에서 개발한 물질입니다. 반타의 가장 큰 특징은 빛의 99.96%를 흡수한다는 것인데요. 머리카락 굵기의 1만분의 1에 지나지 않는 탄소 구조체가 가시광선은 물론, 적외선까지 흡수한다고 하니, 빛이 거의 남지 않은 셈입니다. 이러한 속성을 갖고있는 반타블랙은 마치 마술을 부리는 듯합니다. 반타블랙이 입혀진 사물은 제아무리 입체적인 것이라도 평면으로 보이거든요. 마치 시공간이 뻥 뚫린 블랙홀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반타블랙은 원래 우주를 연구하는데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해요. 우주는 기본적으로 빛과 열이 없는 곳이죠. 따라서 우주를 연구할 때는 빛의 간섭이 최소화된 우주 망원경이나 인공위성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영역에 반타블랙이 사용되는데요. 빛뿐만 아니라 전파도 흡수하는 강한 흡수력, 방수 기능, 영하 196℃~300℃의 온도를 견디는 내구성, 구리의 7배가 넘는 높은 열전도성까지. 우주를 연구하는 데 있어 이처럼 완벽한 조건의 색은 없겠죠. 반타블랙은 그야말로 완벽한 색이자 만능 물질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후 반타의 인기는 점차 영역을 넓혀갔는데요. 기존의 우주산업뿐만 아니라 제트기를 만드는 군사 산업, 태양열에너지, 자동차, 의류, 그리고 예술 분야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반타블랙을 독점한 아니시 카푸어
그런데 비극적이게도, 이 매력적인 색을 예술 분야에서는 마음껏 사용할 수 없게 되었는데요. 바로 영국의 조각 예술가인 ‘아니시 카푸어 (Anish Kapoor)’ 때문입니다. ‘클라우드 게이트’라는 설치 조형물로 이름을 알린 그는 시각예술 발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까지 받은 조형예술계의 거장입니다. 문제는, ‘아니시 카푸어’가 Surrey Nano systems에 거액을 지불하고 반타블랙의 예술적 사용권을 독점했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 오직 ‘아니시 카푸어’만이 반타블랙을 사용한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에요. 이 소식에 전 세계 예술가들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크게 반발했어요. 하지만 아니시 카푸어 측에서는 ‘정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계약했는데,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라며 당당하게 응수했습니다.


카푸어만 사용할 수 없는 색
이런 카푸어의 반응은 분노에 차 있던 예술가들에게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는데요. 특히 영국의 예술가 ‘스튜어트 샘플(Stuart Semple)’은 카푸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갚아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하여 World's pinkest pink(세상에서 가장 분홍색다운 분홍)를 개발했는데요. 스튜어트 샘플은 색을 공표하면서, ‘아니시 카푸어’뿐만 아니라 카푸어와 관련된 누구도 이를 사용할 수 없도록 조항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개발된 노랑, 파랑, 초록 시리즈 역시 ‘Not available to Kapoor(카푸어 사용 금지)’ 조항을 포함하고 있어요. 그야말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죠.
이후 ‘스튜어트’는 다른 예술가, 과학자와 힘을 모아 반타블랙과 가장 비슷한 ‘Black 2.0’, ‘Black 3.0’을 개발하는 데도 성공합니다. 이 색들은 반타블랙과 거의 똑같은 흡수력은 물론 사물과의 접착력도 우수하고, 향까지 좋아 많은 호응을 얻게 되는데요. 결정적으로 반타블랙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라고 합니다. ‘마음씨 좋은 스튜어트’는 힘들게 개발한 두 색을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답니다. 아, 당연히 ‘카푸어’만 빼고요! 이정도면 정말, 완벽한 복수죠?



‘색의 전쟁’을 발발시킨 치명적인 매력의 반타블랙! 그 가치를 반영하듯, 현재는 영국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다고 해요. 때문에, 영국 정부의 허가를 받은 회사나 연구기관, 교육기관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색이 되었습니다. 이 귀한 반타블랙을 우리나라에서도 잠깐 볼 수 있었어요. 평창동계올림픽 기간 동안 올림픽 플라자에 설치했던 ‘현대 파빌리온‘에서였죠. 파빌리온은 우주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건축물이었는데요. 외관에 반타블랙을 입혀 미래 지향적인 느낌을 구현해냈습니다. 건물을 실제로 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정말 우주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하네요! 언젠가, 다시 한국에서 반타블랙의 황홀경을 느낄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참고자료
- 최영훈, 『색채학 개론』, 미진사, 1985
- Black 3.0 리뷰 영상, https://youtu.be/4PSaGS5i1Yw
- 현대 파빌리온 홍보 영상, https://youtu.be/j9y88c4ud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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