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사라진 다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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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된다.”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꼭 뒤이어 등장하는 독일의 경제학자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의 명언이에요. 개별적인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제각기 다른 사건들을 엮어놓은 모양새지만, 그 사건들이 모여 이루는 전체적인 흐름은 묘하게 일정한 패턴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일정한 패턴'이라고 해서 갸우뚱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다들 한 번쯤 경험해봤을 겁니다. 역사책을 읽다 보면 분명 과거에 벌어진 일인데 우리가 사는 현재와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경험이요. 이처럼 우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고 다가오는 미래를 예상합니다. 상상하기도 하고 설계해가기도 하지요. 오늘은 이러한 역사의 특징을 잘 살린 연극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해요.
🙄연극 속의 연극
연극 <당선자 없음> 은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으로 알려진 제헌헌법이 만들어진 과정을 소재로 한 작품이에요. 박 피디가 제헌헌법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제작 의뢰를 받고 라 작가와 헌법학 전공자인 금 교수를 섭외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죠. 그런데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면서 박 피디는 회사의 압박을 받게 됩니다. 다큐멘터리 구성안에 하나의 연극이 등장하는데요. 제헌헌법에 관한 일제강점기 배경의 그 연극을 회사에서 탐탁치 않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70여 년의 시차를 두고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기 시작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연극은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특이한 형식을 극 전개에 도입하죠.
바로 극중극(play within a play)이라고 하는 형식인데요. 이 형식은 말 그대로 연극 속의 연극을 뜻합니다. 극 속에 또 다른 연극을 재현함으로써 동시에 두 가지 연극을 보는 듯 한 느낌을 자아내는 메타드라마1)의 주요 기법 중 하나죠. 극중극 형식을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연결성을 신경 써야 합니다. 두 연극의 내용이 별개로 설정되면 관객들이 작품의 주제나 메시지를 파악하는 게 힘들어질 테니까요.
극을 집필한 이양구 작가도 이를 염두에 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한 인터뷰에서 이 작가는 '2022년, 제헌헌법에 관한 이야기 하는 이유' 에 대해 “연극 속 과거와 현재의 시간은 모두 정치적 격동의 '전환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면서 “지속적인 변동 과정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해방 후 단독정부 수립까지의 시간을 동질적인 시간으로 인식하며 집필했다” 고 밝혔거든요. 그렇다면 제헌헌법이 만들어진 1948년과 현재 대한민국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성이 있을까요?
- 1) 메타 드라마 : 전통적인 사실주의 연극의 틀에서 벗어나 연극을 사실의 반영이 아닌 연극 그 자체로 인식하게 하는 연극 혹은 연극론.
💨공정한 미래를 향해
다큐멘터리 제작의 자문역을 맡은 금 교수는 박 피디에게 관련 자료를 보여주며 이익균점권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헌법 초안을 작성할 당시, 시민들의 목소리가 그 안에 담기지 못했는데, 일부 정치인과 시민들이 노력해서 이익균점권 조항을 넣을 수 있었다고요. 그러면서 이익균점권이 무엇인지도 알려주는데, 내용이 파격적입니다. 이익균점권이란 '사기업의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기업에서 발생하는 이익의 분배에 균점2)할 권리' 라는 거죠. 사기업에서 창출한 이익은 기본적으로 오너 일가의 것이라 여기는 우리의 생각과 정반대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익균점권 조항은 5.16 쿠데타를 거치면서 사문화(死文化)3)되고 말아요. 연극은 이러한 이익균점권의 역사를 1948년과 현재 대한민국 사이의 연결 고리로 사용합니다.
1948년에 이익균점권을 도입했던 대한민국에서 '회사가 있어야 노동자가 있다'는 정반대의 논리로 아무렇지 않게 프로그램 제작을 방해하는 모습을 보이거든요. 물론 라 작가가 프로그램에 넣고자 했던 연극은 문제의 소지가 있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의 임금을 비롯한 기본권 문제를 무시해도 되는 건 아니었죠. 이처럼 연극은 '회사와 노동자, 둘 중에 무엇이 우선인가?'라는 질문 아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회사와 노동자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공정한 사회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하게 합니다.
연극의 마지막 부분, 무대에 설치된 TV를 통해 1948년 국회 본회의 현장에서 이익균점권 수정을 논의하는 목소리가 전달됩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는 블랙박스형 극장4)은 마치 그 현장에 관객들도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죠. 그리고 관객들은 헌법 작성 과정 중 결국 머무르지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시민들로 치환됩니다. TV를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는 다양한 연령대, 성별의 목소리로 전환되며 사라진 시민들이 된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여전히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라 작가, 회사와 노동자들 사이에서 고통받다 쓰러진 이정 피디, 마음과 다르게 회사 입장을 대변해야 했던 금 교수. 모두가 현재 우리의 모습이고 이를 바로 잡지 못하면 미래의 우리 역시 비슷한 삶을 살게 될 거라고요. 그리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TV를 통해서 다가올 미래를 확인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공정한 사회의 도래를 위해서 어떠한 행동을 하실 건가요?”
- 2) 균점 : 이익이나 혜택을 고르게 나누어 받는 것을 말해요.
- 3) 사문화(死文化) : 법령이나 규칙 따위가 실제적인 효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 4) 블랙박스형 극장 : 무대와 객석의 벽을 과감히 허물고,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무대 형태에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는 실험적인 공연장 형태를 뜻해요!
✅솔직 핵심 정리 노트
ㅇ박수갈채드립니다
- 평소 연극에서 보지 못한 형식과 장치를 사용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연극이 가진 새로운 모습과 매력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답니다.
ㅇ요건 쫌 아쉬운데
- 아무래도 '헌법' 이란 소재가 우리에게 익숙하진 않아서 처음에는 연극이 추상적이고 어렵게 다가왔어요. 이 장벽을 넘어야 연극이 가진 진가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게 아쉬웠고요.
💬Editor’s Comment
연극 <당선자 없음> 은 두산아트센터에서 운영하는 두산인문극장 프로그램의 일환입니다. 두산인문극장은 매년 주제를 정해서 그와 관련된 강연, 연극, 전시 등을 진행하는데요. 올해 두산인문극장의 주제는 '공정' 으로, 연극 <당선자 없음> 은 2022 두산인문극장에서 선보일 연극 프로그램의 포문을 열었죠. 연극 <당선자 없음>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오는 5월 29일까지 공연될 예정이에요. 깊은 몰입감과 메시지를 갖고 있는 작품이니 연극이 진행되는 120분의 시간이 아깝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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