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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이 제일 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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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머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를 든다면, 단연코 풍자와 해학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두 단어는 항상 붙어 다니는 탓에 언뜻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죠. 하지만 풍자란 ‘남의 결점을 다른 것에 빗대어 비웃으면서 폭로하고 공격함’을 뜻하고 해학은 ‘익살스럽고도 품위가 있는 말이나 행동’을 뜻하는 말로, 사실 두 단어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어 뜻을 알고 나니 새삼 풍자와 해학이 더욱 쉽지 않은 일처럼 여겨지는 것 같은데요. 누군가의 결점을 진흙탕 싸움이 되지 않게끔 익살스럽지만 품위 있게 비판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니까요. 이 어려운 일을 다양한 형태의 작품으로써 간결하게 해내는 이가 있답니다.

 

예술이 제일 쉬웠어요

  제목을 보고 ㅇㅇ이 무엇일지 궁금하셨나요? 사람마다 ㅇㅇ 안에 들어갈 대답은 모두 제각기 다르겠지만, 데이비드 슈리글리(David Shrigley, 1968~)에 의하면 ㅇㅇ은 바로 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데이비드 슈리글리 <EXIBITION> 展 포스터 ©K현대미술관

“예술가의 특권은 아무거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한 말처럼, 데이비드 슈리글리는 핵심 활동 영역인 드로잉을 초월해 설치, 조각,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작품의 형태를 넘나들며 활동합니다. 자신만의 독특하고 신랄한 유머를 작품을 통해 드러내며 여러 사회 이슈들에 대한 성찰적인 태도를 이끌어내죠. 2013년 영국의 대표적인 현대미술상 ‘터너 프라이즈(Turner Prize)’에 노미네이트되어 영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아티스트 중 하나로 우뚝 선 그는 2020년에는 시각 예술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영 제국 훈장(Order of the British Empire, OBE)까지 받았답니다. 그런 그의 초기 작품부터 최근 작품까지 아우르는 전시가 K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 관람 역시 K현대미술관 운영팀 팀장님, 학예팀 큐레이터님과 함께 했는데요. 빼곡한 즐거움을 자랑하는 그의 작품세계로 들어가 볼까요?
  데이비드 슈리글리의 활동 영역은 비단 미술 분야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미술관을 벗어나 출판, 음반, 영화 분야에서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왔죠. 때문에 이번 전시에서는 드로잉, 사진 작품에서 파생된 설치 작품, 애니메이션까지 함께 만나볼 수 있습니다.

 

‘반려조각’이라는 개념을 내세운 <뱀> ©softcorner

  위 사진은 데이비드 슈리글리가 기존에 작업한 드로잉 작품이 세라믹 조형 작품으로 다시 탄생한 것인데요. 드로잉 작품이 그려진 상자에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너 혼자 외로워하지 않아도 돼. 이 뱀을 친구로 삼으렴.” 이렇게 그의 작품 대다수에는 특정한 메시지가 수반됩니다. 이 작품의 경우 꽤나 귀여운 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런가 하면 어떤 작품에서는 “정치인들은 날 토하게 만든다니까.”하고 제법 직접적이고 공격적인 메시지를 전하기도 합니다.

 

<Politicians make me sick> ©artimage

  데이비드 슈리글리는 일상 속의 사소한 순간과 장면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든다고 이야기했는데요. 따라서 작품 속 메시지들이 전하는 바를 살펴보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로서의 고민과 지향점이 엿보입니다. 동물권, 환경, 인간관계, 번아웃 등 현대인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만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죠. 자칫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런 이야기들을 그는 간결한 메시지와 외마디 외침과 같은 강렬한 그림체, 아기자기한 색채와 표정 등을 통해 유쾌하게 변모시킵니다. 작품을 통해 내지르는 비판은 날카롭지만, 그럼에도 웃음을 자아내곤 하는 까닭에 그의 작품은 종종 영국 블랙코미디의 정수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동물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I hate human beings> 시리즈 중 ©artsy.net

그렇게 생각하세요? 정답입니다!

전시장 초입 섹션 안내 ©K현대미술관

  “아주 멋지고 재미있고 흥미로운 전시를 만들어보자!” 전시장 입구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습니다. 이 역시 간단하고 쉬운 문장이지만 데이비드 슈리글리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죠. 전시공간 역시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이번 전시에 앞서 직접 내한하여 공간을 만들고 꾸몄는데요. 때문에 전시장 내의 모든 공간들이 그의 생각과 예술을 대변하는 듯, 곳곳에서 자유로움과 대범함,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그의 드로잉 작품을 보고 있으면 다시금 그가 일상 속에서 영감을 얼마나 빠르고 섬세하게 캐치해내는지 실감하게 되곤 하는데요. 결코 큰 크기의 작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작품이 가득한 공간 자체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답니다.
  사실 이번 전시를 관람하며 한 편으로는,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너무도 직접적인 그의 메시지, 혹은 메시지가 없다면 단순히 가벼운 웃음과 공감만을 불러오는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이죠. 해석하는 미술, 숨겨진 의미들을 찾아내는 감상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그의 작품들은 계속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K현대미술관과의 소통 혹은 이전의 인터뷰에서도 계속 그래 왔듯이, 데이비드 슈리글리는 작품의 의미를 찾는 질문들에 일절 응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자신과 관람객이 생각하고 있는 바가 다르더라도 전혀 문제 되지 않으며 모든 생각이 정답이고, 혹은 작품에 아무 의미가 부여되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전했는데요. 그의 입장을 듣고 나니, 이러한 차단이 오히려 관람객에게 작품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람객과 함께 만들어가는 <드로잉 룸(Drawing Room)> ©K현대미술관

  더욱이 관람객의 존재란 현대미술에서 특히나 매우 중요한 주체가 됩니다. 데이비드 슈리글리는 관람객이 작품을 충분히 즐기고 저마다의 사색을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하며 <드로잉 룸(Drawing Room)> 섹션을 구성했습니다. 이곳에서 관람객들은 2013년 터너상 후보작품이었던 <Life Model Ⅰ>의 후속작, <Life Model Ⅱ>를 직접 그리고 전시해볼 수 있죠. 이곳은 그림을 그리는 이들에게도, 혹은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에게도 훌륭한 소통의 장이 됩니다. 사람마다 기억하고, 강조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저마다 다른 것은 데이비드 슈리글리가 전하는 ‘어떤 생각이든 정답이 된다’는 메시지를 증명하는 듯합니다.

 

✅솔직 핵심 정리 노트


ㅇ박수갈채드립니다

  • - 1200여 점이 넘는 방대하고 다양한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이번 한국 전시에서 최초 공개하는 신작까지!)
  • -  딱딱한 미술을 거부하는 키치하고 아기자기한 농담의 향연.
  • -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 전시장 내부를 안내하는 방식 등 곳곳에서 일관된 컨셉을 보는 재미가 있다!
  • - 동시대의 사회 이슈에 대한 생각을 힘들지 않은 방식으로 불러온다.
  • - 작품 속 메시지를 한글로 번역해주는 친절한 안내서가 비치되어 있다.
  • - 다른 관람객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끔 하는 관람객 참여 섹션이 있다.

 

 

 

💬Editor’s Comment
  훌륭한 창작자는 타인에게도 창작하고픈 마음에 불꽃을 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 좋은 책을 읽고 나면 글을 쓰고 싶어지고, 멋진 사진을 보고 나면 저 역시 주변의 어떤 풍경을 사진에 담고 싶어지거든요. 데이비드 슈리글리 또한 저에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선물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꽃이 꺼지기 전에 곧바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장까지 마련해주었고요. 덕분에 전시장을 나서며, 넉넉하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절로 깨닫게 되었답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은 마음이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데이비드 슈리글리가 해냅니다. 역시 그에게는 예술이 제일 쉬운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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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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