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만의 화려한 부활, 바흐의 ‘마태수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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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낭만주의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Bartholdy). 그는 1829년 3월, 베를린의 징 아카데미(Berliner Singakademie)에서 장장 3시간에 달하는 대곡을 지휘했습니다. 바흐가 작곡한 이곡은 초연부터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을 뿐더러, 바흐의 사후 그와 함께 잊혀져있던 곡이었어요. 멘델스존이 이를 선곡했을 때, 모두 반대할 정도였는데요. ‘그 길고 지루한 곡을 누가 듣겠냐’는 이유에서였지요. 하지만 100년 만에 연주된 이 곡은 관객과 비평가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고, 그 인기는 두 차례의 추가 공연이 급히 마련될 정도였어요. 이후 바흐의 다른 작품들까지도 더불어 재조명받기에 이르렀는데요. 1729년 바흐의 초연 후 무려 100년 만에 부활해 바흐에게 영광을 안겨준 곡, 바로 ‘마태수난곡’입니다.

바흐와 라이프치히 시기
마태 수난곡은 바흐의 일대기 중, 마지막 27년을 장식한 라이프치히 시기에 작곡 되었어요. 이 시기에 바흐는 세속 음악보다는 교회 음악에 관심을 갖고 많은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이 때, 그의 작품들은 바이마르와 쾨텐 시기를 거치며 음악적으로 원숙해져있었어요. 그의 작품의 꽃을 피우기 위한 비옥한 토양이 마련된 셈이었죠. 바흐는 당시, 쾨텐의 궁정악장을 사임하고 라이프치히로 이주하며 토마스 교회(Thomaskirche)의 칸토르(Kantor)이자 음악 감독으로 일하게 되었는데요. 1723년부터 1729년까지, 라이프치히 초기 약 6년간 그는 자신의 생애동안 작곡했던 대부분의 교회 성악곡들을 이 시기에 작곡하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습니다. 칸타타, 오라토리오, 수난곡, 건반악기 연습곡, 콘체르토, 오르간 곡 등을 넘나들었어요. 그가 작곡한 대부분의 칸타타(Kantata)는 이 시기에 작곡되었고, 지금까지 총 200여곡의 칸타타가 전해지고 있는데요. 이중, <눈뜨라 부르는 소리 있도다(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 BWV 140)>는 현재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입니다.
👉 칸타타(Kantata)란?
바로크 시대의 성악곡 양식으로 독창, 중창, 합창 그리고 기악 반주가 결합되어 있어요!

마태 수난곡은 어떤 곡?
마태 수난곡은 1729년 4월 15일, 성 금요일(Karfreitag)에 라이프치히(Leipzig)의 토마스 교회(Thomaskirche)에서 초연되었어요. 독창자와 두 개의 합창단, 두 개의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했고요. 연주 시간은 무려 3시간에 달하는 대곡이었죠. 마태수난곡은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종교 극음악 양식인 ‘오라토리오(Oratorio)’ 양식을 띠고 있어요. 오라토리오는 등장인물과 플롯을 갖고 있는 오페라와 비슷한 점이 많지만, 오라토리오만의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는데요. 연기나 분장, 무대 장치 등이 없고, 합창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합창과 아리아 사이에 극의 진행을 이끌어가는 해설자인 ‘에반겔리스트(Evangelist)’가 등장한다는 것이에요. ‘복음사가’라고도 부르는 에반겔리스트는 복음서를 집필한 저자를 의미하는데요. 에반겔리스트는 극 전체의 줄거리를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마태 수난곡에서는 테너가 마태 역할의 에반겔리스트를 담당하고 있어요.

마태 수난곡은 성서의 신약성경 중 마태복음의 26장과 27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린 곡이에요. 1부(제1곡-제29곡)와 2부(제30곡-제68곡)로 나누어집니다. 성악곡인 이 곡은 합창과 레치타티보(Recitativo), 코랄(Choral), 아리아(Aria)의 네 축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합창은 여러 사람이 함께 노래하는 것이고, 레치타티보는 말하듯 노래하는 것이에요. 코랄은 합창의 형식을 갖고 있지만 전래되는 종교적 가사를 사용한 다성 음악을, 아리아는 주인공의 감정을 노래로 나타내는 부분입니다.
시대를 앞선 참신한 종교음악
마태 수난곡은 그 시대의 여느 수난곡과는 달리, 참신한 시도를 꾀한 작품이에요. 바흐만의 특징이 잘 녹아있는 곡이죠. 곡의 본문은 성경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시인 피칸더(Picander-Christian Friedrich Henrici)의 대본을 차용해 자유롭고 서정적인 색깔을 더했어요. 또, 폴 게르하르트(Paul Gerhardt) 대본에 하슬러(Hans Leo Haßler)의 코랄 선율을 사용하기도 했는데요. 신앙심이 깊었던 바흐는 루터교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이렇게 그만의 자유로운 감성까지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마태 수난곡은 바흐 살아생전에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이런 신선한 음악적 시도들은, 전통을 우선시했던 당시 지역의 명사들과 음악가들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들은 이 곡의 화려함과 웅장함이 신의 명예를 실추시킨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바흐는 사람들의 비판을 묵묵히 감내하며 그의 생에 몇 차례나 마태 수난곡을 연주했어요. 자신의 음악적 신념을 끝까지 관철하고자 했던 이런 바흐의 노력에도, 시참사회(council of aldermen)와 교회 당국자들은 지속적으로 그를 비난했어요. 단단한 벽에 맞서 고독한 싸움을 했던 바흐는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점점 종교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1730년 전후로 그의 교회 음악 작곡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고, 이후 그는 교회음악에서 눈을 돌려 세속 곡 창작에 힘쓰게 되었어요. 그리하여 훗날 그의 대표작으로 남은, <이탈리아 협주곡>,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악적 헌정>등의 명곡을 만들어 내었죠.
-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바로크 음악 양식을 활용하면서도 바흐 자신만의 개성까지 담아낸 곡이예요. 당시, 철저한 형식과 관습에 메여 곡을 써야했던 시대적 상황에서, 이런 바흐의 새로운 시도와 노력은 무조건적인 비난을 받아야 했는데요. 100년 후에서야 이 곡은 비로소 인정받기 시작했어요. 바흐 역시, ‘잊혀진 구 시대의 작곡가’에서 ‘시대를 앞서간 작곡가’로서 재탄생할 수 있었고요. 멘델스존의 ‘마태 수난곡’ 공연 이후, 바흐 광풍이 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 광풍의 도화선이 되었던 바흐의 곡, 마태 수난곡을 지금 감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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