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아파도 다시 한번, 첼리스트에서 지휘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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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 리(Earl Lee, 1982~), 출처: 얼 리 페이스북

  지난 6일 미국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Boston Symphony Orchestra, 이하 BSO)는 새로운 부지휘자로 한국계 출신 캐나다인 얼 리(Earl Lee, 1982~)를 소개했어요! BSO의 140년 역사상 한국계 지휘자의 활동은 성시연(1976~)에 이어 두 번째인데요. 얼 리는 원래 첼리스트 유망주였어요. 하지만 갑작스러운 근육 이상증으로 인해 왼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지휘자로 전향을 해요. 이렇게 BSO의 부지휘자로 임명된 그의 성공 스토리가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한 편의 영화 같은 그의 음악 인생에 대해 알려드릴게요~

 

😷 갑작스러운 건강 이상, 첼리스트에서 지휘자로! 

  얼 리는 어린 시절부터 첼로와 함께했어요. 그는 소수정예 실력자들만이 입학할 수 있는 필라델피아 커티스(Curtis Institute of Music)와 뉴욕의 줄리아드 음악원(The Juilliard School)을 거칠 만큼, 첼리스트로서 인정받는 유망주였어요. 그러던 2008년 어느 날, 그는 왼손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아요. 첼로에서 왼손은 지판의 음정을 짚어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인데요. 진단을 받아보니 왼손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국소근긴장 이상증이라는 소견을 듣게 돼요. 갑작스럽게 찾아온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인해 그는 왼손은 사용할 수 없게 되고 말아요. 그래도 얼 리는 포기하지 않고 2~3년 동안 재활 치료에 최선을 다해요. 하지만 한번 다친 근육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첼로만 바라보고 살아왔던 그의 하늘은 무너지고 말았죠.

  그래도 세상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얼 리는 첼리스트 대신, 지휘자로 새롭게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어요. 시련을 통해 단단해진 그는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데요. 지휘자인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고, 학교를 등록해 오케스트라 스코어(score, 악보)를 읽는 법부터 배워요. 첼로 악보만 보던 그에게, 모든 악기의 악보가 함께 있는 스코어를 읽기란 쉽지 않았는데요. 음악을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하루에 8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 공부에만 몰두해요. 그는 맨해튼 음대(Manhattan School of Music, MSM)와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지휘를 차근차근 배우면서 지휘자로 성장하기 시작해요. 그 결과, 그는 캐나다 토론토 심포니(Toronto Symphony Orchestra)의 상주 지휘자(2015~2018년), 미국 피츠버그 심포니(Pittsburgh Symphony Orchestra)의 부지휘자(2018~2021년)로 활동하며, 지휘자로 이름을 알리게 됐어요!

 

지휘자 얼 리,  출처: 중앙일보

 🔍 희망 스토리의 주인공인 지휘자 얼 리는 누구?

  그의 한국 이름은 이얼. 전남 여수 출신인 그는 11세에 캐나다로 가족들과 함께 이민을 갔어요. 이민을 가기 전까지 다녔던 초등학교 오케스트라에서도 첼로 파트를 담당할 만큼, 어린 시절부터 첼로에 대한 애정이 넘쳐났고요. 이민을 가서도 항상 첼리스트를 꿈꿀 정도였어요.  그러던 그는 힘든 고통의 시기를 이겨내고 마침내 BSO의 140년 역사 속 두 번째 한국계 지휘자가 되었어요! BSO 부지휘자 임명은 오디션으로 진행되었어요. 총 4명의 지휘자에게 오디션을 제안했고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통해 얼 리를 최종 부지휘자로 선정한 것이죠. 앞으로 얼 리는 3년 동안 BSO의 모든 공연에 동행하고 2022년 보스턴 심포니홀 정기공연과 탱글우드 공연 무대에 올라요. 그리고 올 해 국내에서도 얼 리를 만날 수 있다는 것, 알고 있나요? 우선 오는 31일 여수국제음악제의 지휘 무대에 오르고, 10월 15-16일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함께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 1841~1904)의 <교향곡 7번(Symphony No. 7 in D minor)>을 선보일 예정이에요. 

 

🧐 연주자에서 지휘자로, 어렵지 않을까?

  한 가지 악기만을 연주하던 연주자가 다양한 악기의 조화를 만들어야 하는 지휘자로 전향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비올리스트이자 지휘자로 활동 중인 이승원(1990~)은 지휘자 교육을 받고 콩쿠르에 나가는 것 부터 굉장히 어렵다고 이야기했어요. 지휘 콩쿠르는 기악 콩쿠르보다 나이 제한을 두지 않다보니 경쟁률이 센 편이라고 했어요. 더군다나 혼자 오디션을 보거나 몇몇 악기와 협연을 하는 정도의 시험이 아닌, 50인 이상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치르는 본선은 부담감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데요. 하지만 이러한 기회마저도 기악 콩쿠르에 비하면 많지 않은 편이에요. 게다가 마스터클래스나 아카데미 워크숍 또한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다 보니, 수업을 듣기 위한 경쟁이 콩쿠르만큼이나 치열해요. 

  첼리스트에서 지휘자로 전향한 장한나(1982~)는 무엇보다 책임감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해요. 첼리스트였을 때는 혼자만의 싸움이라 나만 책임지면 되었지만, 지금은 100여 명의 연주자와 함께 달려가기 때문에 팀에 대한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또한 지휘자의 시선에 따라 음악이 다르게 표현되므로, 음악에 대한 책임감도 빼놓을 수 없어요. 이처럼 연주자에서 지휘자로의 전향은 새로운 배움을 넘어, 제한된 기회 속 치열한 경쟁과 막중한 책임감이 따르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어요.

 

🎼 부상으로 인해, 악기대신 지휘봉을 든 이들

  얼 리처럼 연주자의 삶을 살다가 부상으로 인해 지휘자로 전향한 예술가들이 있어요. 과거 그가 악기를 연주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만큼, 지휘자로 성공한 이들이 많은데요. 고난을 통해 새롭게 성장한 이들은 누군지 한 번 볼까요?

 

피아노 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ibert Von Karajan, 1908~1989), 출처: claaicfm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ibert Von Karajan, 1908~1989)
  베를린 필 하모닉(Berlin Philharmonic Orchestra)의 거장, 카라얀이 원래는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클래식 황제’로 불리는 카라얀은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신동으로 유명했어요.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Universität Mozarteum)과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University of Music and Performing Arts, Vienna)에서 피아노를 공부했지만, 힘줄을 싸고 있는 막에 염증이 생기는 건초염으로 인해 손가락에 이상이 생기면서 피아니스트로의 꿈을 접게 되었죠. 그 후 지휘자의 길로 전향하게 되었고 1929년 빈 음대를 졸업한 직후,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Mozarteum-Orchester Salzburg)를 지휘하며 지휘자로 데뷔하게 되었죠. 데뷔와 함께 독일의 울름 오페라극장(Theater Ulm) 지휘자로 취임했는데요 당시 열악한 극장 상황으로 인해, 카라얀은 공연에서 직접 피아노를 치고 지휘를 했던 일화는 굉장히 유명해요!

 

오자와 세이지(Ozawa Seiji, 1935~),  출처: 월간조선

  👉오자와 세이지(Ozawa Seiji, 1935~)

  오자와 세이지는 카라얀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인데요. 7세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한 후, 1951년에는 일본의 도호[東寶]음악학교에서 작곡과 지휘, 피아노를 함께 공부했어요. 피아니스트의 꿈을 차근차근 키워나가던 어느 날, 럭비 경기 중에 손가락을 다치게 돼요. 그리고는 피아노를 포기하고 지휘에 전념하게 되었죠. 그 후 1961년 카네기홀(Carnegie Hall) 무대에 오르면서 세계무대에 데뷔하게 되었고, 카라얀을 만나 지도도 받아요. 카라얀의 제자로서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라(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의 부지휘자로 활동하며 세계적인 지휘자로 우뚝 서요!

 

막심 벤게로프(Maxim Vengerov, 1974~), 출처: 한겨레

  👉 막심 벤게로프(Maxim Vengerov, 1974~)

  5살에 솔로 리사이틀을 열고 10대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만큼 바이올리니스트 영재로 주목받던 막심 벤게로프. 21세기 클래식 스타로 주목받던 그에게 2005년, 한 가지 시련이 찾아와요.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바이올린 연주를 중단할 수 밖에 없게 된 거예요. 스타였던 그의 부상은 대중의 관심사였고, 많은 언론은 그를 향해 절망적인 기사를 쏟아냈어요.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활 대신 지휘봉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먹어요. 절망감에 대한 에너지를 배움에 쏟으면서 지휘자로서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죠. 그리고 마침내 2007년, 베르비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Verbier Festivals Orchestra)와 함께 카네기홀에서 지휘자로 성공적인 데뷔를 해내요. 그러다 2011년, 그는 다시 바이올리니스트로의 복귀를 선언해요! 바이올린에 대한 그의 사랑이 아픔을 극복하게 만든 것일까요? 부상과 공백으로 인해 예전의 기량을 보여주기 어려울 것이라고 다들 걱정했지만, 그는 마치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듯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어요. 

 

💘 젊은 연주자들이 지휘봉을 잡는 이유는? 

  부상이 아니라도 연주자가 지휘자로 전향한 사례도 있어요. 지휘자 장한나(1982~)와 김선욱(1988~)은 어렸을 때부터 각각 첼리스트, 피아니스트로 연주활동을 이어오다가 자연스럽게 지휘봉을 잡았어요. 이들은 지휘도 하지만 연주에 대한 행보 역시 지속할 것이라고 하면서 악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어요. 장한나는 첼로와 지휘를 병행하는 것은 작곡가와 음악에 대한 시각을 넓혀주며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고 말해요. 김선욱도 지휘 공부는 피아노의 연장선에 있다며 지휘를 통해 피아노를 더 잘 치고 음악을 더 넓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이 깊어진다고 보았죠. 

  앞에서 말씀드렸던 비올리스트 이승원은 지휘의 매력을 ‘성취감’과 ‘이중적 소통’으로 꼽았어요. 지휘자는 강한 설득력으로 각자 다른 음악적 생각을 가진 단원들의 연주를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을 가져요.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을 통해, 연주자일 때보다 더욱 큰 ‘성취감’을 느낀다고 해요. 또한 연주자는 관객과 직접 소통하지만,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와 소통한 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 낸 음악으로 관객과 또 한 번 소통하는, 그런 ‘이중적 소통’이 남다른 매력을 가진다고 보았죠.

  과거에는 연주와 지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클래식에 존재했어요. 그래서 연주자가 지휘자로 무대에 선 이후 다시 악기를 잡기가 쉽지 않았죠. 그러나 이러한 강박은 젊은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어요. 지휘를 선택이나 변경이 아닌 음악 영역의 확장으로 보는 것이죠. 유명한 연주자보다는 훌륭한 음악가로 거듭나길 원하는 젊은 음악인들의 생각이 클래식에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어요.

 

 

💬Editor’s Comment

  갑작스러운 사고에도 음악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이들도 있고, 신체적 장애가 있어도 장애와 함께 음악을 즐기는 연주자도 있죠. 또한 솔리스트이지만 음악 안에서 다른 분야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는 이들도 있어요. 독주자, 오케스트라 수석, 지휘자 등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음악과 함께하지만, 이들 모두가 바라는 것은 결국 음악으로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음악에 대한 꿈을 놓지 않고, 달려가는 이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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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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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지휘 #첼리스트 #클래식 #오케스트라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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