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계 필수템, 부채 나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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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기만 해도 끈적끈적 해지는 무더운 여름이었죠. 에어컨이나 선풍기 앞을 떠나기가 무서울 정도였어요. 그럼 전기가 없던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무더운 여름을 견뎠을까요? 선조들의 손에는 바로 이것, ‘부채’가 들려있었습니다. 아래 두 그림에서 보듯 말이죠. 오늘날 부채는 장식품, 또는 전통 선물의 아이템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죠. 하지만, 부채는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템’으로 남아있습니다. 바로, 판소리꾼들의 부채인데요. ‘촥’ 펴졌다 ‘탁’ 접히는, 소리꾼들의 연기를 돕는 합죽선(合竹扇)입니다.


대나무로 만든 부채, 합죽선
‘合竹扇(합할 합, 대나무 죽, 부채 선).’ 세 글자의 조합에서 알 수 있듯, 합죽선은 대나무 여러 겹을 합쳐서 만든 부채에요. 대나무의 겉대를 햇빛에 비칠 만큼 얇게 깎아서 만들기 때문에 가벼운 것은 물론이고, 내구성까지 견고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죠. 이러한 이유로 합죽선은 옛 선비들의 사치품이자, 사신들을 위한 선물, 임금의 하사품으로 활용되었어요. 합죽선을 만드는 과정은 녹록지 않다고 해요.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 ‘김동식’ 장인이 ‘약 150번의 손이 가야 비로소 부채 한 필이 만들어진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이 고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만큼, 합죽선의 퀄리티는 한번 부쳐보면 진가를 바로 체감할 정도로 뛰어납니다. 타 부채들과 비교해보면, 훨씬 적은 힘을 들이면서도 더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어요.

소리꾼의 손에는 늘 부채가 들려있어 왔습니다. 판소리에서 부채가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아래의 그림과 사진이 19세기의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부채가 꽤 오랜 시간 동안 소리꾼의 무대 소품으로 활용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노래하는데 왜 굳이 소품이 필요하지?’라는 의문을 갖고 계신 분들이 계신가요? 그 이유는 판소리의 특징에서 비롯됩니다.


판소리와 합죽선
판소리는 창자(唱), 고수(鼓), 청중이 모여 한편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의 공연이죠. 현재 전승되는 다섯 바탕은 완창에 최대 여덟 시간이 걸릴 정도로 긴 시간이 소요되는데요. 소리꾼은 이 긴 시간을 오직 아니리, 소리, 너름새만으로 채워야 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부담감을 가지고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긴 시간 동안 소리만 계속된다면 끝까지 집중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때문에 판소리에서는 곡의 내용을 전개하고 표현하는 ‘아니리’와 ‘소리’만큼, 몸동작을 보여줄 수 있는 ‘너름새(발림)’도 매우 중요하게 활용하고 있어요. 소리꾼들은 이 ‘너름새’에서 눈빛, 표정연기, 손동작, 부채를 동원해가며 곡의 전달력을 높입니다. 이때, 가볍고 튼튼한 부채가 소리꾼들의 만능 소품이 되는 것이고요.
소리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채를 손에 지닙니다. 무대 위뿐만 아니라,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말이죠. 연습할 때에도 부채는 빠질 수 없는 소품인데요. ‘부채’가 없으면 ‘북채’라도 쥐고 연습을 한다고 하죠. 무대 위에서 부채의 역할이 톡톡히 있기도 하지만, 이것이 소리꾼의 기본적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른손에 합죽선을 쥐는 것을 기본자세로 삼고 있거든요. 이 자세를 취해야만 소리꾼으로서의 마음가짐까지 준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부채는 소리꾼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데요. 합죽선은 어떻게 저들의 소리를 도울까요? <흥부가>에서는 흥부가 박을 타는 대목에서 부채가 ‘촤르르-’ 펼쳐지며 톱으로 표현되고요. <심청가> 중, 아기를 어르는 대목에서는 부채를 안아 마치 강보에 쌓인 아기처럼 표현해요.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에선 부채가 같이 툭 떨어지기도 하고요. 이후 부채는 심봉사의 지팡이로 사용되다가, 그가 눈뜨는 대목에서 ‘촥-!’ 펼쳐지며 클라이맥스의 감동을 극대화해주기도 한답니다. 부채의 쓰임새가, 그야말로 없어서는 안 될 ‘만능’이죠?
21세기의 판소리는 창작 판소리, 창작극, 창작 국악곡 등 여러 변화를 겪고 있죠.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부채의 활용도 또한 다양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정동극장의 기획공연 <적벽>에서는 스무 명이 넘는 배우들의 단체로 부채를 “쫙-!” “촥-!” “촤르륵-!” 펼치며 눈과 귀가 꽉 찬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고요. 옛 선조들이 그랬듯, 21세기 판소리꾼들에게도 부채는 ‘필수템’인 것이죠. 현대의 소리꾼들에게 부채는 어떤 의미일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소리꾼들이 생각하는 합죽선
“부채는 소리꾼들이 표현할 수 있는 멋이며, 시각적으로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부채를 든 판소리꾼은 너름새 안에서 몸짓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정순임(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부가 보유자)
“부채는 소리꾼에게 있어 독창성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도구이다. 창작곡을 할 때에도 꼭 부채를 드는 이유는 소리꾼으로서 정통에 뿌리를 두는 것이며, 타 장르와도 구분이 되고, 무대 위에서 극적인 표현도 가능한 소품이 되기 때문이다.”
-소리꾼 이봉근
“부채는 소리꾼으로서의 또 다른 분신이다. 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부채로 상황을 더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리꾼 오단해
“판소리는 가만히 서서 노래만 하는 게 아니라 연기와 춤까지 복합적으로 표현하는 장르다. 그럴 때 부채는 소리꾼의 신체 연장선상에 놓인다. 부채가 몸으로 표현하기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고 극대화 시켜준다.”
-소리꾼 유태평양
판소리에서 부채는 서사극의 표현을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이며, 소리꾼의 신체의 연장이기도 하며, 무한한 창작물의 흥을 돋우는 소품으로 쓰입니다. 부채를 들고 있지 않은 소리꾼의 무대는 상상하기가 어렵죠. 단아한 한복에 군더더기 없이 심플한 합죽선이 과하지 않고 심심하지도 않게, 참 잘 어울리기도 하고요. 요즘에는 배터리로 구동되는 손 선풍기를 흔히 볼 수 있는데요. 우리 고유의 부채, 합죽선에도 눈을 돌려보는 건 어떨까요? 전자파도 없고, 무엇보다 왠지 좀 멋스러운 느낌을 주거든요. 다음 여름은 모두가 접부채를 들고 판소리 공연을 즐기며 더위를 ‘촥!’ 날릴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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