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기방을 탈출한 아티스트,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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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 허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明月)이 만공산 허니 쉬어간들 어떠리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알려진 황진이가 벽계수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지은 시입니다. 자신의 기명인 ‘명월’에 중의적인 의미를 담아 재치 있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 뛰어난 평가를 받아왔죠. 보통 ‘기생’이라고 하면, 단순히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여성들을 떠올리실  수 있는데요. 이는 편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방면으로 수준 높은 실력을 갖춘 여인들이었습니다. 왕족과 지체 높은 고관대작, 유생을 상대해야 했기에, 그에 맞는 소양을 갖춰야 했던 것이죠. 그랬던 그들이 기방을 벗어나더니, 대중문화를 이끌고, 새로운 유행가를 부르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는데요.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기생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신윤복 <연소답청> ©문화재청

 

 

기생은 누구일까?

신윤복 <청금상련> ©네이버 두산백과


  기생(妓生), 그들은 누구였을까요? 사전적으로 ‘기생’은 전통사회에서 잔치나 술자리의 흥을 돋우기 위해 제도적으로 존재했던 여성 특수 직업을 뜻하는데요. 기녀(妓女), 화류계여자(花柳界女子),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에서 ‘해어화(解語花)’고도 불렸습니다.

  기생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요. 조선의 실학자였던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그 뿌리를 후백제의 ‘양수척’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려가 후백제를 흡수하면서 가장 다스리기 힘들었다는 ‘양수척’은, 원래 소속도 없고 부역도 지지 않는 떠돌이 집단이었어요. 이후 그들을 노비 읍적에 올릴 때, 용모가 고운 여자를 골라 춤과 노래를 가르치면서 기생을 만들었다는 주장입니다. 반면에 기생의 발생을 ‘무녀(巫女)의 타락’에서 찾는 견해도 있습니다. 고대 제정일치사회에서 사제로서 군림하던 무녀가 정치와 종교 권력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쓸모를 잃고 기생으로 전락하였다는 설이죠. 어찌됐건, 두 가설 모두 기생의 사회적 신분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실제로 기생은 조선사회에서 양민도 못되는 팔천(八賤), 조선시대의 여덟 천민(사노비(私奴婢) ·승려 ·백정(白丁) ·무당 ·광대 ·상여군(喪輿軍) ·기생 ·공장(工匠))의 하나였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의 연예인이 된 기생

  조선후기, 천민의 신분을 가졌던 기생들에게도 봄이 찾아온 것일까요. 갑오개혁(1894)으로 궁중과 지방관청에 속한 관기 300여명이 해산되었고, 천민 신분을 가진 여성음악들 역시 면천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 속내는 달랐습니다. 말이 ‘자유’지, 한순간에 직업을 잃고 대량 실직자가 된 기생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죠. 그들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기생 일을 이어나갔는데요. 기존의 신분제가 무너진 이상, 부유한 양반층이 아닌 ‘대중’을 위한 예술을 펼쳐야 했습니다. 대중예술가로서의 첫 걸음마를 뗀 것이죠. 신분 면천과 사당의 해체 등 격변의 19세기를 살던 여성음악가들은 기녀·*삼패(三牌)·사당으로 나뉘어졌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무대에 함께 오르며 모두 한데 섞였습니다.

*삼패: 대한제국(1897~1910) 시절 서울에서 소리를 전업으로 삼은 무리. 삼패는 당시 사회적으로 하류의 한량(閑良)들이었다


  이들은 1902년 국립극장으로 개장한 협률사를 필두로, 이후 광무대, 단성사, 연흥사, 장안사, 원각사 등의 극장에서 판소리, 기생가무, 무동, 환등 등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극장의 전성기와 맞물려 그들의 활동무대가 대중 앞에서 공연을 하는 극장으로 옮겨진 것이죠. 일부 기생들은 아예 극장 전속 아티스트로 고용되어 활동했다고 해요. 극장도 처음에는 관기의 레파토리로 공연을 하다가,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기 위해 전국 각지의 기생을 수용하는 등 점차 스펙트럼을 넓혀나갔습니다. 공연의 종류는 다양해졌고 ‘전직’ 기생들은 이제 대중의 관심을 받는 ‘대중 연예인’으로 거듭났습니다.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당시 유일한 신문이었던 대한신보에서 그들의 공연과 사적인 이야기가 담긴 가십성 기사로 지면을 할애할 정도였죠. 지금 신문의 연예면 기사와 다를 바 없는 내용이 재밌기도 한데요. 광무대 소속 기생이었던 ‘옥엽’에 관한 기사를 함께 보시죠.

예단일백22 오옥엽
금이냐 옥이냐 동자삼이냐 광무대 안에는 옥엽이로다. 고향은 어디메뇨 경상도 창녕땅, 금년이 십사세라. 잘하는 것은 승무, 춘향가, 방자노름, 기타 잡가 등이라. 구세부터 대구 기생조합에서 공부하고 십일세에 경성으로 올라오는 즉시로 광무대에 매일 출연하여 다수한 관객의 환영을 받는 터이라. 간사히 어리광 같이 재주피우는 것은 옥엽이의 소장이오, 관객의 칭찬하는 바이라. 십사게의 어린 몸으로 고생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근근히 벌어서 조부모의 늙은 몸을 봉양하는 것은 옥엽이의 가상이라. 얼굴은 아리답고 성품도 싹싹하여 사람을 대하면 눈에서부터 웃음을 보이는 것은 옥엽이의 태도로다.
▲ 저는 전에 공부할 때 선생의 발길에 어띠 몹시 채였던지 그로 인해 병이 들었는데, 지금이 o이 되어 항상 가슴에 매어달려 있으니 그것이 공부한 효험이지요. ▲그 고생을 해가면서도 공부를 해서 지금 이렇게 이름이 났으니 이후에도 더욱 연구하여 남에게 칭찬을 더 받고 싶습니다․․․․․ (이하생략)
(『매일신보』1914. 2. 24)

 

 

대중음악가로서 기생의 활약

  이 기세를 이어 1900년대 초, 한국의 음반 시장이 태동하던 흐름을 타고 일부 기생들이 음반활동으로 영역을 넓히기 시작합니다. 1911년 일본 축음기상회에서 발매한 첫 레이블에는 기생 ‘김홍도’의 서도소리와 서울소리가 담겼고, 1913년 발매된 닙보노홍의 레이블에도 마찬가지로 기생 ‘조모란’과 ‘김연옥’ 등이 녹음한 가곡·가사·시조와 서도소리, 잡가 등이 담겼죠. 이들은 특히 경서도 소리를 중심으로 녹음을 진행했는데요. 대중의 많은 수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의 인기를 얻고 음반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요구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겠죠. 기생의 인기는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1910년대 400명 남짓이었던 기생의 수가 1930년대에는 600여명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기생은 좁은 기방을 빠져나와 궁중과 양반을 위한 명분 음악이 아닌, ‘대중음악가’로 재탄생했습니다. 격변했던 시대의 흐름 속에서 굳이 ‘천한 것’들의 소리를 버릴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어떤 이유에서건, 외부로부터의 많은 편견을 감내해야 했을 것 같은데요. 그 덕분에 우리의 문화는 더욱 풍성해 질 수 있었습니다. 거친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도 한국 전통음악의 많은 부분이 그들에 의해 전수되어 왔기 때문이죠. 우리의 것을 지켜내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중문화를 만들고 이끌었던 여성들. 그들은 바로 ‘기생’입니다. 

 

 

 


참고자료
 - 이재옥(2001), 「일제 강점기 기생의 공연활동 연구」, 『제 3회 한국예술학과 학술대회』, 학술대회 자료집
 - 김용숙(1998), 「기생」, 『민족문화대백과사전』권4, 한국정신문화연구원편찬부
 - 권도희(2004), 『한국 근대음악 사회사』, 민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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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08-05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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