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미술관이 아닙니다, 이곳은 ‘파울클레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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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들에게 유럽여행이 유독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랜 역사와 문화? 혹은 유럽 대륙에의 로망, 아니면 축구 리그 때문일까요. 하지만, 이토록 풍부한 문화를 자랑하는 유럽의 여행지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 기억에 남는 장소는 그리 많지 않죠. 그중 하나는, ‘이야기’가 있는 곳일 거예요.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는 파울클레(Paul Klee,1879-1940)의 미술관이 있습니다. 지금의 ‘파울클레 센터’로 관람객들을 맞이하게 되기까지, 파울클레를 열렬히 존경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고 하는데요. 파울클레 센터, 그곳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 파울 클레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始祖)라 불리는, 파울 클레 (Paul Klee, 1879-1940)는 죽기 전까지 왕성한 제작활동을 했습니다. 사후에 그의 아들은 파울클레 재단을 운영했는데요. 1990년 파울 클레의 아들이 죽게 되죠. 그리고 그 부인은 남편에게서 물려받은 700점의 작품을 베른 시에 기증하기로 합니다. 이후 파울 클레의 손자 ‘알렉산더 클레’가 소유하고 있던 850점의 작품과 가족 소유의 기록물까지 영구대여 형식으로 기증하면서 ‘파울클레 미술관’의 설립 계획이 구체화되었죠. 파울클레 재단은 50년 가까이 연구해 온 2500점에 대한 자료와 기록뿐만 아니라, 150점의 개인 소장 작품까지 영구 대여해 방대한 양의 작품을 모두 미술관에 이양했고요. 그런데 이 방대한 양의 자료들을, 대체 어디에 전시하고 보관할 수 있었을까요?
두둥, 모리스 뮐러의 등장
당시 파울클레 재단은 미술관 부지를 찾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어요. 이때 등장한 한 사람! 파울 클레의 마니아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모리스 뮐러(Maurice E. Müller, 1918~2009)’였습니다. 그는 정형외과 의사로서 세계적인 명성과 부를 갖고 있었죠. 이런 그가, 재단에 획기적인 제안을 합니다. 쇼스할덴에 있는 대규모 부지와 3000만 스위스 프랑을 기증하기로 한 것이죠. 대신, 그는 단순한 아트 뮤지엄이 아니라 조형예술, 음악, 문학 등 종합예술을 펼칠 수 있는 장소가 만들어지길 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2005년 베른시 동부 외곽의 ‘쇼스할덴(Schosshalde)’이라는 한적한 마을에, ‘파울클레 미술관’이 아닌, 복합 문화 공간 ‘파울클레 센터’가 개관하게 되었죠.


렌조 피아노의 걸작, 파울클레 센터
뮐러 교수는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디자인 설계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혹시, 렌조 피아노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는 그 유명한, 파리의 ‘퐁피두 센터’를 설계했죠. 그의 손에서 또 하나의 걸작, 파울클레 센터가 탄생하게 됩니다. 넓은 벌판에 살포시 내려앉은 물결이 보이시죠? 완만한 등고선을 살린 혁신적인 디자인 덕에 파울클레 센터는 주변 풍경에 완전히 녹아들었습니다. “나는 농부처럼 이 대지에서 작업했다. 곡식이 익어가듯이 건물이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기다렸다”라는 렌조 피아노의 말처럼 말이죠. 물결을 따라 위아래로 출렁이다 보면, 전원 교향곡을 그대로 자연에 그려 넣은 듯한 느낌도 들지요. 이것은 렌조 피아노가 처음부터 계획했던 요소이기도 한데요. 그는 이 공간을 찾는 모두가 파울 클레가 가지고 있는 음악성을 함께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랐다고 해요.

음악에도 재능이 있었던 파울 클레
렌조 피아노가 간파했듯이, 파울 클레의 작품에는 음악적 요소들이 다분합니다. 파울 클레는 음악적으로도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어요. 음악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던, 가정환경의 영향이었을까요. 화가가 되긴 했지만, 그에게 ‘음악’은 미술만큼이나 중요한 표현 수단이었습니다. 파울 클레는 음악과 미술의 상응관계를 조명하여 빨강, 노랑, 파랑을 중심으로 색채의 구조를 파악한 ‘매직 사각형(magic squares)’ 이론을 만들었어요. 그는 이것을 자신의 작품에도 접목했는데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파르나소스에서 (Ad Parnassum)>를 보겠습니다. 점들로 이뤄진 이 그림에서 클레는 음악의 다음(多音, polyphonic)을 연상시키는 회화의 조형 요소를 배치했죠. 이러한 ‘다음적 요소’는 클레의 추상회화에서 ‘독립된 주제들이 동시적’으로 등장하여 음악적 운율을 갖게 되는 시각적 요소로 볼 수 있어요.

파울클레 센터의 이모저모
파울클레 센터는 클레가 생전에 남긴 1만점의 작품 가운데 40%에 가까운 4,000여 점의 작품과,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남긴 중요한 전기 자료도 소장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복합 문화 공간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클레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장 외에도 부수적인 공간이 들어서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세계적인 공연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300석의 규모의 오디토리움(공연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곳에는 앙상블 파울클레라는 단체가 상주하고 있어, 연 4회의 정기공연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크고 작은 연주회가 열리고 있어요. 미술관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식사할 수 있는 레스토랑도 매우 인기가 있는데요. 비스트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특징인 이 식당에서는 일류 요리사의 감독 하에 조리된 현대적인 요리가 손님들에게 제공되고 있습니다. 보고, 듣고, 마시고! 파울클레 센터는 모리스 뮐러 교수의 의도대로 베른시를 대표하는 랜드 마크로 자리매김해 있죠.


그냥 미술관이 아닌, 파울클레 센터는 이런 곳이었어요. 파울 클레를 안팎으로 담고 있는 복합 예술 공간! 예술에 진심이었던 뮐러와, 남다른 안목을 지닌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없었다면 이 독특한 문화공간은 만들어질 수 없었을 테죠. 파울 클레의 작품을 더 재밌게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은 물론이고요. 파울 클레는 참 행복한 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파울클레 센터는 우리에게도 그저 ‘뻔한’ 미술관 중의 하나로 남지 않을 것 같은데요. 훗날, 여러분의 기억 속에 파울 클레의 작품과 이 이야기가 함께 머물러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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