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클래식 작곡가를 덕질할 수 있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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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하기 위해 무대에 올라가서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기. 뚜렷한 조성과 박자가 없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멜로디. 15분 동안 드럼만 죽어라 치거나 한 번에 4대의 그랜드 피아노, 5대의 마림바를 함께 연주하는 음악. 20세기 모더니즘을 지나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도래한 현대음악의 특징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과연 음악이 될 수가 있는 걸까요? 그냥 음악이라 고집부리는 것이 아니냐고요? 글쎄요, 시대상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오늘은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이 시대 대표 작곡가 스티브 라이히를 알아볼게요.
😎내 음악은 더 넓은 세상을 꿈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 1936~)는 아버지의 권유로 7살에 피아노를 접하게 되었어요. 이후 드럼에 관심이 생겨 14살에는 드럼을 배우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로 빠져들었죠. 16살에는 철학을 공부하다가 줄리어드 음대에 들어가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라이히는 미국 서부 중심으로 형성된 반문화 히피와 재즈, 락 음악의 영향도 많이 받았어요. 소수민족과 고대음악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뒤 아프리카 가나, 예루살렘, 인도 등 제3세계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비서구권 음악을 연마하기도 했는데요. 이때 아프리카 타악기를 직접 연주해 보고 리듬감을 익히면서 아프리카 리듬을 차용해 본인의 음악에 쓰기도 했어요. 전통 악기를 접하게 되면서 여러 나라의 음악적 소재를 사용해 곡을 만든 것이죠. 그렇게 라이히는 여러 장르의 음악을 접하면서 본인만의 음악적 세계관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라이히는 인도네시아의 가믈란 음악1)이나 아프리카 드럼 음악 등 종족음악2)과 재즈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재즈 연주를 위해 드럼을 배우기도 했던 그는 1971년 아프리카 가나대학에서 체류하는 5주 동안 타악기를 공부했는데, 이때 받은 영감으로 <드러밍(Drumming)>이라는 곡을 작곡했답니다. 이 곡을 들어보면 진짜로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모여서 그들의 전통 타악기를 치는 장면이 상상돼요. 또, 1976년에 발표했던 <18인의 음악가를 위한 음악>이라는 곡에서는 화음이 반복되고 변화할 때마다 메탈로폰이라는 악기로 신호를 보내는데, 이는 가믈란이나 아프리카 음악에서 악단의 리더가 다음으로 넘어갈 때 연주자들에게 알려주는 방법이에요. 비서구 음악을 적극적으로 본인의 음악에 들여온 것이죠. 그리고 라이히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심을 음악에 녹여내기도 했는데요. 20세기에 일어난 세 가지 큰 사건인 원자폭탄 실험, 독일 체펠린비행기 추락, 복제양 돌리의 탄생 등을 조명하며 20세기 과학기술의 발전과 암시를 음악적으로 표현한 비디오 오페라 <세 가지 이야기(Three Tales)>를 만들기도 했답니다.
1) 가믈란 음악은 인도네시아의 전통적인 기악 합주곡이예요. 실로폰, 북, 징 등 다양한 악기로 연주된답니다.
2) 종족음악이란 비서구 문화 혹은 원시 문화의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음악을 이야기해요.


👀스티브 라이히를 알려면… 미니멀리즘 음악!
산업혁명 이후 과학과 기술이 눈부시게 성장하며 세상이 변화해 온 것은 익숙한 사실이죠? 이에 따라 예술계의 상황도 바뀌었는데요. 제일 먼저 미술계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었어요.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50년대 미국은 추상표현주의가 성행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 작가들은 시대적으로 불안한 마음을 화폭에 격정적으로 표현하곤 했죠. 격렬한 동작으로 붓을 휘두르며 그림을 그리거나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놓고 물감을 떨어뜨리거나 흩뿌리는 것처럼 말이에요. 1960년대에 들어서는 작가의 감정과 주관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추상표현주의 시대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조형 수단을 사용하는 스타일이 유행했어요. 이때 만들어진 작품들을 ‘미니멀 아트(Minimal Art)’라고 새롭게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름 그대로 ‘최소한, 극소의 미술’이라는 뜻으로, 절제된 양식과 단순한 제작 방식이 특징이에요. 추상표현주의 시대와는 다르게 자기표현을 억제하고 작품의 색채·형태·구성을 단순화했죠. 재료와 형식을 기본적인 단위로 축소한 것은 예술가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정 표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었어요. 이렇게 미술 분야의 미니멀 아트를 시작으로 비슷한 문화 양식이 문학, 음악, 무용, 건축 분야로 확대되었어요. 이것이 ‘미니멀리즘(Minimalism)’음악의 시초가 되었고요.
미니멀리즘은 1960년대 기성세대 작곡계와 서양 음악 전통에 대항하며 시작되었어요. 종전의 낭만주의는 작곡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음악적 표현과 음형의 다양한 변화, 독특한 장식음 등의 음악적 기법을 추구했었는데요. 미니멀리즘은 지나치게 다채로운 이런 음악에서 벗어나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어떠한 발전도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리듬이나 선율, 화성을 단순화한 음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답니다. 미니멀 아트가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을 축소한 것처럼 말이죠. 한마디로 ‘최소한의 요소로 만들어진 음악’이 미니멀리즘 음악이라고 할 수 있어요. 미니멀리즘 음악은 단순한 요소들의 반복적인 패턴이 특징이며 화성적으로는 정체되어 있어요. 또, 저음 지속음이나 지속적인 비트, 또는 맥박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흐르는 펄스3)를 가지고 있는 것 또한 미니멀리즘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설명이랍니다.
3) 펄스(Pulse)는 심장박동처럼 일정한 박이 계속 반복되는 리듬을 뜻해요.

✨단순하고 새로운 음악?
미니멀리즘 음악이 많이 알려진 뒤, 라이히는 기존에 사용했던 화려한 화성과 복잡한 음조를 배제하고 아주 느리게 조금씩 변주되는 대규모 작품들을 만들었어요. 하나의 코드나 짧은 모티프4) 등 최소한의 소재가 반복되는 음악이죠. ‘단순한 선율, 화음의 반복과 조합’이 대표적 특징이라 말할 수 있어요. 새로운 방식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랍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듣기만 해도 어렵지 않게 감상할 수 있어요.
4) 모티프(motif)는 음악 형식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예요. 선율의 기본이 되는 최소 단위의 멜로디죠.
그가 작곡한 곡의 제목만 봐도 그 특성이 잘 나타나 있는데요. 그의 대표곡 중 <18인의 음악가를 위한 음악>을 한번 살펴볼까요? 이 곡은 여러 대의 피아노와 마림바, 그리고 관·현악기와 사람의 목소리를 가지고 만든 곡이에요. 연주자는 모두 18명이죠. 말 그대로 18명이 연주하는 곡이라 <18인의 음악가를 위한 음악(Music for 18 Musicians)>인 거예요. 제목부터 단순함이 느껴지죠? 곡 자체도 시작부터 끝까지 리듬의 흐름이 일관적이라 아주 단순해요. 작은 단위의 리듬으로 만들어진 짜임새가 점진적으로 확장해 기승전결을 이룬답니다. 18명이 연주하면 복잡하고 어려울 것 같다고요? 찬찬히 듣다 보면 누가 피아노를 치는지, 마림바에서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 사람의 목소리가 어떤 타이밍에 등장하는지 저절로 알게 될 거예요.
라이히의 곡 중 특이한 곡이 하나 더 있는데요. 일전에 택시 운전 알바를 했었던 라이히는 도시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서 영감을 받아 자동차 경적 소리, 경보음, 사이렌 소리, 기차 소리가 녹음된 곡을 만들었어요. 바로 <City Life>라는 곡입니다. 소규모의 관현악단 연주가 들리는 한편 사람 목소리나 기차 지나가는 소리, 자동차 문 닫는 소리도 같이 들려요. 바깥의 소음이 섞여서 들리는 것 아니냐고요? 아니요! 정말로 라이히가 녹음한 소리랍니다. 이처럼 라이히는 음악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곤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계속 앞으로!
대학교에서 작곡 공부를 하던 시절 라이히는 본인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며 끊임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곡을 쓰다가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그는 본인의 음악을 이렇게 얘기했죠. “사람들이 어떠한 음악적 교육이나 전문가의 조언 없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음악을 즐기기를 원한다”라고요! 당시 미니멀리즘 음악이 얼마나 단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에요.
이처럼 미니멀리즘 음악은 작곡가의 심오한 감정을 작품에 녹여내거나 본인의 기량을 자랑하던 기존의 음악과는 확실하게 다른 양상을 보여요. 무언가를 표현한다기보다 어떠한 ‘효과’를 가져온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극도로 단순화된 음악 재료들을 무한정으로 반복시키며 서서히 변화하는 것이 특징인 미니멀리즘 음악은 다른 음악 사조들과 융합되면서 점점 그 범위를 넓혔어요. 20세기 초반, 기존의 현대음악과 재즈, 록, 민속음악 등 가능한 모든 재료들이 하나로 녹아들면서 더 발전한 것이죠. 그러나 기존의 현대음악을 고수하려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탐탁지 않았어요. 클래식 음악에서 흔히 사용하는 음계로부터 많이 벗어난 음악이었으니까요. 미니멀리즘 음악은 한 옥타브 안에서 12개의 음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해 악곡을 구성하는 일명 ‘12음렬’을 사용했는데요. 게다가 당시 오락적인 요소라고 치부되던 대중음악까지 끌어들였으니, 클래식에 익숙한 사람들로서는 미니멀리즘 음악이 기존에 정립되어 있었던 현대음악을 비웃는다고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니멀리즘은 지금도 계속 그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답니다.
미니멀리즘 음악의 특성을 가진 곡을 들으면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미니멀리즘 음악의 묘미는 미세한 변화에 집중하는 것이죠. 음악적 재료가 반복되다가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포착해보는 거예요. 사람들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음악을 즐기는 것을 라이히가 바랐듯, 삶의 무게를 좀 덜어내고 싶을 때 스티브 라이히의 음악을 한번 들어보는 것 어떨까요?
ㅇ참고자료
- 객석. “미니멀리즘 음악의 세계”. 2016.
- 박정은. “미니멀리즘에 대하여 : 필립 글래스의 Mad Rush와 스티브 라이히의 Violin Phase를 중심으로”.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 민은기. “서양음악사2”. 음악세계. 2005
- 홍정수. “음악학”. 심설당.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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