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같은 인연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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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라는 욕망을 안 가져본 사람은 없을 거예요. 비단 한 때였을지라도 말이에요. 어느 목적을 위해서 인들 간에, 인생의 선배님들은 늘 인맥을 관리하라는 조언을 서슴지 않고, 우리는 네트워크를 넓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오고 있죠. 하지만, 때론 진짜 친구 한 명이 그저 그런 수 백 명의 친구들보다 귀한 ‘선물’이 될 수 있어요.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작곡가였던, 리스트와 바그너처럼요. 그들의 인생 말년까지 지속된 그들의 우정은 단순한 ‘친구’, 그 이상의 것이었어요. 그래서 힘껏 서로를 응원하기도, 분노하며 서로를 원망하기도 했었죠. 자, 그럼 이 두 낭만파 음악가들의 선물 꾸러미를 열어볼까요?
리스트와 바그너, 그 숙명적 만남!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와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는 1842년,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만났어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와 무명의 작곡가, 바그너. 리스트는 바그너에게 질투의 대상이자,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어요. 쉽게 가까워질 수 없었던 두 천재 음악가는, 1948년이 되어서야 바그너의 당시 근거지였던 드레스덴(Dresden)과 리스트가 음악의 꿈을 펼쳤던 도시, 바이마르(Weimar)를 오가며 친분을 쌓게 되었어요.
당시 바그너는 작품들의 계속되었던 실패로 빚에 허덕이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리스트는 그런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며 바그너의 작품들이 빛을 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리스트는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Tannhäuser)’ 서곡의 지휘를 맡아 성공적으로 연주를 마쳤어요. 리스트의 지휘로 상영된다는 것부터가 큰 화젯거리였는데요. 그는 또, <탄호이저> 서곡을 피아노로 편곡해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게 했고, 오페라 전체가 당시 예술의 중심지였던 바이마르에서 반드시 연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그의 완고한 의견에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는 1949년, 바이마르에서 초연되었어요. 바그너는 리스트의 지휘 아래, <탄호이저> 리허설 공연을 지켜보았는데요. 이때, 바그너는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성공을 짐작했던 것 같아요. 바그너는 그 감격했던 순간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어요.
“내가 그 음악을 작곡하면서 느꼈던 것을 그는 공연하면서 느꼈다. 내가 작곡하면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그는 소리로 만들어내면서 선언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이 가장 희귀한 친구의 사랑을 통해 집 없는 신세가 되려는 바로 그 순간에 나의 예술을 위한 진정한 집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바그너의 성공은 이 선물 같은 친구 덕분에 승승장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러던 중, 바그너에게 위기가 찾아왔어요. 바그너가 드레스덴에서 일어난 혁명운동에 가담했고, 이 혁명이 실패로 끝남으로 인해 그의 신변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드레스덴을 떠나야 했어요. 이 긴박했던 순간에, 리스트는 바그너가 스위스로 피신할 수 있도록, 위험을 감수하고 그의 뒤를 봐주었어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둘의 믿음은 더욱 단단해졌고요.
리스트 딸 코지마를 둘러싼 두 예술가의 갈등
바그너가 스위스에서 망명하던 중 리스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있어요. ‘나는 당신이 현재의 나의 위상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라 여깁니다. 작곡하고 오케스트라 악보를 보면서 나는 언제나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쯤 되면 이 관계는 단순한 우정이라고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라고 느껴집니다. 리스트는 바그너에게 끊임없이 베풀었고, 바그너는 리스트를 존중했고 그에게 의지할 수 있었죠. 그러나 곧 두 사람의 이 막역한 사이를 거스르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어요.


리스트에게는 코지마(Cosima Liszt, 1837-1930)라는 둘째 딸이 있었는데요. 그녀는 아버지의 제자이자 유명한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 1830-1894)와 결혼해 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어요. 한스는 바그너의 제자이자, 당시 유명한 지휘자였어요. 스승 바그너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던 한스는,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의 초연을 맡아 멋지게 성공시킨 장본인이었죠. 코지마 부부와 바그너는 음악적으로 많은 의견은 나누며 가까이 지냈어요.
하지만, 코지마는 행복하지 못했어요. 파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코지마에게, 독일 베를린은 너무 시골이었고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오랜 지병을 가지고 있었던 남동생과 언니의 죽음을 순서대로 지켜봐야만 했던 것도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죠. 위로가 필요했던 코지마였지만, 남편 한스는 살인적인 지휘 스케줄을 소화하는데 급급했고 그녀의 마음을 보듬어 줄 수 없었어요. 그러던 그녀가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보다 무려 24살이나 많았던 바그너에게 마음을 내주게 되었던 것이에요.

그렇게 코지마는 바그너의 후처가 되어 동거하며 두 딸과 아들을 낳았어요. 도덕적 통념을 벗어난 바그너와 코지마의 애정행각은 독일에 추문으로 떠돌기 시작했지만, 1870년 결국 이 둘은 어느 누구에게도 축복받지 못한 결혼식을 올렸어요. 이 둘의 결혼 소식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된 리스트는 배신감에 휩싸여 크게 분노했어요. 리스트와 바그너의 관계가 산산조각이 난 것은 물론이고요. 그들은 더 이상 소식을 주고받지도, 왕래도 하지 않았죠.
세월 앞에 장사 없다… 리스트의 대인배 모먼트
1872년, 바그너와 코지마가 리스트를 만나기 위해 바이마르를 방문하면서, 그들의 관계는 회복되기 시작했는데요. 리스트의 포용 덕분이었어요. 어렸을 적부터 문학, 철학, 종교에 깊은 뜻을 두었었고, 본인 또한 수도사가 되기까지 여자들과의 염문이 끊이질 않는 등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았던 이력이 있었던 리스트는, 그 둘을 다시 받아들입니다.
이후, 리스트는 지속적으로 바그너의 오페라 작품들을 피아노로 편곡해 세상에 알렸어요. 리스트는 생전에 약 50개 정도의 오페라를 편곡했는데요. 그중에서 바그너의 작품이 열곡이 넘을 정도이니, 둘의 각별한 우정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바그너를 얼마나 아꼈는지 추측해볼 수 있겠죠. 1860년에 작성한 리스트의 유언장에는 바그너에 관한 이야기가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 시대의 예술에서 이미 영광스럽게 된 이름이 있으니, 그 이름은 앞으로 더욱더 빛을 더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은 바로 리하르트 바그너이다. 그의 천재는 내게 불을 밝혀준 빛나는 횃불이었다. 나는 그의 발자국을 따라갔으며 그에 대한 나의 우정은 모든 고귀한 열정의 총화였다.......’ 누군가의 유언장에 이렇게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리스트와 바그너는 친구로서, 동업자로서, 경쟁자로서, 가족으로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물고기와 물 같은 관계였어요. 리스트는 바그너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의 작품이 널리 알려지도록 힘썼으며, 그를 동경했던 바그너는 그의 배려 속에서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그를 존중했죠. 바그너와 코지마의 성급한 사랑으로 그 둘의 우정이 상처 입기도 했지만,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음악적 동지였고, 서로를 동경했어요. 여러분 중에도 이렇게 막역한 우정이 그리운 분들이 있나요? 리스트가 바그너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서 만든 <베네치아의 리하르트 바그너>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무덤에서>를 들어보면서, 여러분의 ‘선물’들을 떠올려 보시는 건 어떨까요?
ㅇ 참고자료
- 김경임. 『낭만파 피아노 음악』, 경북대학교 출판부, 2010.
- 이덕희. 『음악가와 친구들』, 가람기획, 2002.
- Humphrey Searle(김경임 역). 『리스트의 음악세계』, 계명대학교 출판부,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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