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사랑하는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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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패밀리’하면 떠오르는 나라, 영국이죠. 현재 명목상일 뿐인 왕실이 아직까지도 건재한 이유는, 역사와 전통을 중요시하는 문화와 더불어 영국 왕실이 국가의 이미지와 대외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인지, 영국이라고 하면 위엄있고 우아하며, 장중한 느낌이 우선적으로 드는데요. 이런 영국의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한 작곡가가 있습니다. 에드워드 엘가. 대중들에게는 <사랑의 인사>나 <위풍당당 행진곡>으로 잘 알려져 있어요. 영국에서는 이 곡들을 왕족들의 결혼식이나 국가적 행사 때마다 사용한다고 해요. 그가 영국이 사랑한 작곡가로 불리는 이유인데요. 하지만 그가 작곡한 마지막 곡만은 그렇지 못했어요. 그의 생전, 인정을 받지 못했던 그 곡은 대중들의 기억에서 잊혀 졌을까요? 엘가의 음악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엘가, 웅장한 음악가의 소박한 시작
에드워드 엘가(Sir Edward Elgar, 1857-1934)는 1857년 영국 잉글랜드 우스터(Worcester) 인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엘가의 아버지는 피아노 조율사이자 악기점을 운영하였으며 가톨릭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였죠. 엘가는 어릴 적부터 음악가로서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가정환경 탓에, 정식으로 음악적 교육을 받을 순 없었어요. 그럼에도 그는 음악가로서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독학으로 다양한 악기의 연주법과 작곡을 익혔어요.

소박한 삶 덕분에 만나게 된 인생의 뮤즈
1886년, 엘가는 생계를 위하여 피아노 선생님으로 활동하였는데요. 우연한 기회에 앨리스가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엘가를 찾아왔습니다. 훗날, 인생의 동반자이자 음악적 지지자가 되었던 캐롤린 앨리스 로버츠(Caroline Alice Roberts)였습니다. 연상의 여인이었던 앨리스의 아름다움과 풍부한 예술적 소양에 매료되어 엘가는 그에게 한눈에 반했고,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어요. 이후 둘은 결혼을 약속했지만 양가 모두의 반대가 심했어요. 하지만 변함없이 서로를 깊이 사랑했던 엘가와 앨리스는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되었죠.
약혼식을 앞둔 어느 날. 두 권의 책을 출판한 작가였던 앨리스는 엘가에게 <사랑의 은혜(Love's Greeting)>라는 시를 선물합니다. 이에 대한 답으로 엘가는 그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의 마음을 담아 <사랑의 인사(Salut d'Amour, Op. 12)>를 작곡하여 그에게 헌정했고요. 사랑스럽고 따뜻한 선율이 돋보이는 이 곡에는 앨리스에 대한 엘가의 애정과 감사가 그대로 녹아있어요. 1889년 그들이 결혼한 이후, 엘가는 아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작곡가로서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엘가를 향한 앨리스의 끊임없는 지지와 격려는 그가 수많은 명곡들을 탄생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어요. 엘가의 음악 인생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부분의 명곡들이 앨리스와의 결혼 생활 중에 작곡되었죠. 엘가는 <수수께끼 변주곡(Enigma Variations, op.36)>,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es, Op.39)>, <교향곡 1번(Symphony No.2 in A b major, Op. 55)>, <바이올린 협주곡(Violin Concerto in b minor, op.61)> 등을 작곡하며 영국 최고의 작곡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어요. 앨리스는 엘가에게 평생의 연인이자 동반자이자 음악적 영감을 주는 뮤즈였습니다.

시대의 비극을 위로하는 첼로 협주곡. 그러나 …
화려한 명성을 구가하던 엘가는 1919년 10월 26일, 자신이 작곡한 <첼로 협주곡(Concerto in e minor, Op.85)>을 세상에 공개했어요. 이 곡은 활기차고 유쾌했던 그의 이전 작품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었어요. 첼로의 비탄에 잠긴 서정적인 독주와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어우러져 곡 전체에 비극적인 분위기가 흐릅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데요. 엘가가 이 곡을 작곡하기 시작한 1918년, 런던은 황폐함과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시기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시대적 배경에 엘가 본인의 건강상태 악화까지 더해져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어요. 그는 깊은 고통과 슬픔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첼로 협주곡을 작곡했죠. 그 스스로 ‘나의 진정한 대작’이라고 표현할 만큼 많은 공을 들였던 곡이었어요.
이 공연에서 엘가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로 무대에 섰고, 당시 영국의 저명한 첼리스트였던 펠릭스 살몬드(Felix Salmond)가 솔리스트로 협연했어요. 이 첼로 협주곡은 총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악장과 2악장, 그리고 3악장과 4악장으로 두 악장끼리 쉼 없이 이어지며 연주되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관객들의 반응은 냉랭했어요. 당시 한 비평가는 ‘엘가의 곡은 비웃음거리가 되었다’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영국의 최고의 작곡가로 추앙받고 있었던 엘가의 곡이 비웃음거리로 전락한 이유에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어요. 당시 바쁜 연주 일정에 시달렸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충분한 연습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올랐기 때문이라고도 하고요.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곡의 분위기 때문이라고도 해요. 전후 상황에서 음악을 통해서라도 비참한 현실을 탈피하고 싶은 대중의 열망을 만족시켜 주지 못했던 것이죠. 초연에 실패한 후 이듬해, 사랑하는 아내인 앨리스가 급격한 건강 악화로 인해 세상을 떠나기까지 했는데요. 그의 참혹했던 마음을 말해주듯 그의 빛나던 작곡에 대한 영감 또한 함께 스러졌습니다. 그렇게 그는 말년까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수작들을 작곡하지 못했고 1934년 2월 23일 세상을 떠났어요.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재발견하다
그렇게 잊힐 뻔했던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1962년, 다시 세상에 나왔습니다. 로열 페스티벌 홀(Royal Festival Hall)에서 루돌프 슈바르츠(Rudolf Schwarz)가 지휘하는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영국의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é)’가 이 곡을 연주했어요. 공연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40여년 전 혹평을 받았었던 그의 곡은 청중들을 완벽하게 매료시켰고, 이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에 대한 재평가와 열광적인 관심으로 이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되살아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현재까지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는 곡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엘가의 바람대로 말이지요.

영국 클래식 음악의 르네상스는 엘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는 앨리스의 응원과 사랑에 힘입어 작곡을 시작했고 그의 대부분의 곡은 나이 40세가 넘어서야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늦깎이 작곡가였어요. 영국 최고의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던 그가 아쉬움을 남겨놓아야 했던 단 한 곡, <첼로 협주곡>. 이 곡은 사후에 이르러 그의 화려했던 명성을 되찾아 주었죠. 그는 현재까지도 영국을 대표하는,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로 손꼽히고 있어요. 엘가의 가장 대중적인 레퍼토리는 우리 역시, 좋은 날이면 늘 듣게 되는 명곡들이죠. 하지만 이번엔 침울하지만 내면 깊이 위로가 되어 줄 <첼로 협주곡>을 감상해 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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