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풍류(風流)는 어떻게 흘러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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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류란 무엇일까

 바람 풍(風) 흐를 류(流)! 풍류를 즐기시나요? 아니, 즐겨본 적이 있으신가요? 풍류, 사전적 의미로는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한국인이라면 ‘그 느낌 아니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하죠. 오늘을 사는 우리 누구나 원하지만, 쉽사리 정의할 수도, 가질 수도 없는 풍류. 어느덧 그저 ‘로망’이 되어버린 단어가 아닐까 싶은데요. ‘풍류’는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녔었고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신라시대, 현묘한 도

  풍류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에 인용된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郎碑序)>라는 비석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교(敎)를 만든 근원은 ≪신사(神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핵심은 3교〔儒·佛·道〕를 포함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집으로 들어가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공자〕는 지요, 무위(無爲)의 사(事)에 처하고 불언(不言)의 교를 행하는 것은 주주사〔노자〕의 종(宗)이요, 모든 악한 일은 만들지 않고 착한 일만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석가모니〕의 화(化)다. 김부식 저, 최호 역. 『삼국사기』. 홍신문화사, 84쪽.

  최치원은 당시 신라를 대표하던 학자였죠. 그는 이 글에서 풍류를 ‘현묘한 도’라고 표현했습니다. ‘현묘한 도’, 꽤 철학적이고 심오하게 들리는데요. 그는 유교적으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 도교적으로는 자랑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고, 말하지 않고 가르침을 행하는 것. 불교적으로는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행하는 것. 모두 ‘풍류’에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풍류’는 유교·불교·도교에서 지향하던 가치를 모두 아울렀던 것이죠. 이는 신라의 화랑정신과 맞닿아 있는 가치이기도 했습니다.

 

고려시대, 지배계층의 문화양식

  이후, 고려 시대의 ‘풍류’는 국가행사로 치러진 종교행사인 팔관회와 관련하여 언급되었습니다. 연등회와 더불어 고려의 중요한 국가 행사였던 팔관회에서는 여러 가지 놀이인 백희가무(百戱歌舞)와 ‘풍류적 특성’이 가미된 가무를 추며 토속 신령들에게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빌었다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전해져온 풍류의 가치가 고려 지배계충의 문화양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지요.

 

조선시대, 멋과 운치를 즐기는 삶의 태도

  조선시대에 와서야 ‘풍류’는 자연을 가까이하고 멋과 운치를 즐기는 삶의 태도를 나타내는 말이 되었는데요. 풍류는 조선 선비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대표적인 풍류로는 시(詩)·서(書)·화(畵)와 음악을 들 수 있습니다. 선비들은 한시(漢詩)와 서예(書藝), 동양화를 감상하거나 직접 그림으로써 풍류의 멋에 빠져들었죠. 조선후기에 이르러 시(詩)·서(書)·화(畵)는 선비의 필수 교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시와 그림이 묶여 하나의 예술로 여겨졌고, 선비들은 그 안에 자신의 철학적 깊이와 문예적 소양을 녹여냈습니다. 지식인들의 문화가 시와 그림으로 향유되었다는 점이 참 멋스럽게 느껴집니다.

김홍도, 그림감상
김홍도, 산수일품첩 中 전다한화

  조선 후기에는 시서화와 더불어 성행했던 문화가 있었는데요. 가객(歌客)과 율객(律客)들이 모여서 사사로이 연주활동을 하던 풍류방(風流房)입니다. 신분계층에 상관없이 한데 모여 음악을 나누고 창작하는 등 새로운 방식으로 음악적 풍류를 즐겼던 것이죠. 조선 전기, 선비들이 나 홀로 풍류를 즐겼던 것이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조선 후기의 풍류 모임은 실학사상의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인물로는 청나라에서 양금을 조선으로 들여왔다고 알려진 홍대용이 있습니다. 성대중의 <청성집> <<기유춘오악회>>에 실린 기록을 함께 살펴볼까요?

"담헌 홍대용은 가야금을 펼쳐 놓고, 성경(聖景) 홍경성(洪景性)은 거문고를 잡고, 경산(京山) 이한진(李漢鎭)은 퉁소를 소매에서 꺼내어, 김억(金檍)은 서양금(西洋琴)의 채를 손에 들고, 장악원의 공인(工人)인 보안(普安) 또한 국수(國手)로서 생황을 불었는데, 담헌의 유춘오(留春塢)에서 모였다" 한겨레음악사전.

  이 중 ‘보안’이라는 사람은 장악원의 악사인 생황 연주자였고, ‘김억’도 중인 출신으로 양반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문신이자 실학자였던 홍대용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그들과 함께 어울려 풍류를 즐겼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풍류방 음악은 그 종류가 더욱 많아지며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죠.

김홍도, 단원도

  ‘바람이 흐른다’라는 풍류의 뜻처럼, 그 의미 역시 시대정신과 호흡하며 변화해 왔습니다. 사회적으로 추구하는 기본 가치에서 국가의 질서 체계로, 또 멋과 운치를 즐기는 삶의 태도로 말이죠. 여러분은 마음속에 어떤 풍류를 담고 계시나요?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하지만 꼭 거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로망’으로만 남지 않는, 진정 즐길 수 있는 자신만의 풍류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참고자료
 - 김부식 저, 최호 역. 『삼국사기』. 홍신문화사.
 - 박소정. 『노자, 언어에 길을 내다』. 성균관대학교 K-MOOC강의.
 - 박혜온. 「국립국악원 및 김죽파 전승 줄풍류의 대금선율 비교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조유회. 「조선후기 실학자의 신분제 인식과 음악활동」. 한국음악사학회, 2010.
 - 한흥섭. 「백희가무를 통해 본 고려시대 팔관회의 실상 - 팔관회는 불교의례인가? -」. 민족문화연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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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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