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가야금이 피아노보다 더 낯선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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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가야금보다 피아노가 익숙할까

  여러분은 어릴 적 엄마의 손을 붙잡고 동네 피아노 학원으로 향했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학원에 수북이 쌓여있던 오선지 공책들, 선생님의 빨간 색연필이 만든 동그라미와 엑스들, 삐뚤빼뚤 그려나갔던 높은음자리표, 샾(#)과 플랫(b)의 모양... 이런 기억들은 지금까지 남아 피아노는 언제 보아도 낯설지 않은 악기가 되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저와 같으실 텐데요. 그렇게 피아노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과 기억 속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국악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냥 지나쳤을 그 기억을, 저는 오늘 조금 다른 생각과 함께 떠올려봤습니다. 그때 기억 속 피아노가 가야금이었다면 어땠을까? 학원엔 왜 가야금이 아닌 피아노가 놓여있었을까? 지금 우리는 왜 가야금보다 피아노가 더 익숙할까.

 

 

가야금의 기원

토우장식 항아리 ©문화재청국가문화유산포털
중국 고대 현악기 슬 ©나무위키

  가야금에 관한 우리나라의 첫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에 있습니다. 진흥왕 12년, 가야의 가실왕이 당나라 악기인 쟁을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고, 이후 우륵이 가야금을 들고 신라 진흥왕에게 귀순했다고 하지요. 가야금에 관한 유적으로는 미추왕릉지구에서 발견된 토우(土偶) 장식 목항아리가 있습니다. 토우에는 가야금을 연주하는 여인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가야금이 3세기 이전부터 연주됐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가야금의 기원에 관해서는 국악계 내부에서도 다양한 관점들이 있는데, 그 기원이 한반도일 것으로 보는 학자들과 동남아시아 혹은 인도의 악기가 전해졌다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또 중국의 문헌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한반도 남쪽에 ‘슬과 같이 옆으로 눕혀서 타는 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보건대 현재의 가야금 모양은 아니었더라도 당시 사람들이 향유하던 고유의 현악기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한 줄의 현으로 시작된 피아노  

  재미있는 것은 피아노도 ‘한 줄의 현’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인데요. 피아노는 1716년 이탈리아의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에 의해 발명되었고, 그 전신은 피타고라스(B.C570-495)의 모노코드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노코드는 귀도 다레초(990?-1033?)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단순한 모양의 악기입니다. 

산투르 연주자

  서양음악학자들이 피아노의 전신을 모노코드라고 이야기하는데 반해, 민족음악학자들은 페르시아의 산투르라는 악기로 보는데요. 산투르는 기원전 669년에 아시리안과 바빌로니안의 암각화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이 악기가 이스탄불을 거쳐 비잔틴으로,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유럽 전역에 전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산투르가 오늘날 우리나라 악기인 양금의 전신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양금은 16세기에 가톨릭 선교사를 통해 중국으로 전해진 것이 17세기 북파 실학자들에 의해 조선으로 도달한 악기입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피아노와 국악기의 하나인 양금은 그 뿌리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투르가 서양에서 피아노가 되는 동안 한국에서는 그 모습 그대로 양금으로 남게 된 셈이니까요.

 

 

피아노, 한반도에 상륙하다

  그럼 피아노는 어떻게 한반도에 오게 되었을까요? 피아노를 향유하던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갔고, 이후 부강해진 그들은 서구 문명 전파와 세계화를 외치며 조선에 오게 됩니다. 당시 선교사들의 기록에는 조선인들에게 노래를 시켰더니 고래고래 악을 쓰더라는 웃지 못할 일화가 있습니다. 선교사들의 눈에는 판소리 혹은 민요 창법의 음악이 어쩌면 미개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그들이 드리는 예배에 비하면, 돼지 목을 치고 칼 위에서 춤을 추는 우리네 굿 문화가 악마의 하수인에게 지배당하는 불쌍한 사람들의 문화로 보였을 수도 있겠지요. 결국 그들은 신식학교를 세우고, 풍금과 피아노로 찬송가를 가르치며 굿이 아닌 예배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조선에 온 피아노는 단지 하나의 악기가 아닌, 거대한 문화와 새로운 세계로의 교체를 의미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 전반적인 시선과 가치가 변화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사람들의 인식도 변했는데요. 새로운 문물을 접한 부유한 부모들은 자식을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 보냈고,  돌아온 지식인들은 한복 대신 양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잘랐습니다. 이는 곧 문화적인 새로운 계층의 탄생을 의미했습니다. 이들이 학교에서 음악교육을 하게 되면서 클래식은 소수만 받을 수 있는 특별한 교육이 됩니다. 서우선의 논문에 의하면 ‘해방 무렵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고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가야금이 어떤 문화적 계층이 다루는 악기였냐고 반문해본다면, 유교적 잔재가 남아있던 사회에서 ‘기생이 연주하는 악기’라는 인식이 있었던 가야금의 처지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피아노보다 가야금이 더 익숙해지는 날까지

  그 기원을 살펴봤듯이, 피아노와 가야금은 실상 어떤 것이 더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왜 피아노가 가야금보다 익숙한 악기가 되었을까요? 피아노가 우리의 일상 깊숙이 자리를 잡는 동안, 국악 또한 고급문화로 자리매김하고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근래 우리가 좋아하는 국악이란 것은 음식으로 치자면 된장이 첨가된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와 같은 형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서양의 화성과 음악적 어법에 맞춰서 국악적인 느낌만 가미한 음악들인 셈이지요. 여백이 많고 좀처럼 변하지 않는 국악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다시 향유물이 되긴 어려울까요? 그래도 여전히 꿈꾸어봅니다. 대한민국에 언젠가 피아노보다 가야금이 더 익숙해지는 날이 오기를 말이죠. 이날을 위해 국악계에서도 무수히 많은 노력을 기울일 테니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 과정을 지켜봐 주시길 부탁합니다.

 

 

 

참고자료
 - Grove Music Online. https://www.oxfordmusiconline.com/grovemusic
 - 서우선. “피아노 도입기 수용계층의 특성과 피아노의 사회문화적 의미.” 민족음악학회, 2007.  
 - 원문으로 읽는 『삼국사기』. https://terms.naver.com/list.nhn?cid=62145&categoryId=62145
 - 이미라. “피아노의 발달과정과 구조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단국대학교, 1997.
 - 이민지. “한국인의 찬송가 수용과 선교사들의 대응.” 한국종교학연주회, 2008.
 - 이용식. “아시아 현악기의 역사와 가야금.” 이화여자대학교 음악연구소, 2006.
 - 조현범. “19세기 조선의 종교문화를 바라보는 천주교 선교사의 시선.” 한국역사민속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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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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