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힙쟁이, 판소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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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흥 열풍이 내려온다
“호랑이가 왔다, 울지 마라”라는 어머니의 말에도 울던 아기는 ‘곶감’ 얘기에 눈물을 뚝 하고 멈춥니다. 그런 곶감이 무서워 저 멀리 숨은 줄만 알았던 범이 얼숭덜숭한 몸을 이끌고 현재 ‘K-흥 열풍’으로 제대로 내려왔습니다. BTS의 <Dynamite>가 전 세계 아미(Army)들을 향해 화려한 폭죽을 쏘아 올렸다면,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는 ‘K-국악’으로 세계인들과 함께 어깨 그루브를 탔죠. 유튜브 누적 조회 수 5억 뷰를 기록한 이날치 그룹의 <범 내려온다>. 판소리는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민간 음악계의 센세이션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난다 긴다 하는 전기 8명창, 후기 8명창이 한양 한복판에서 부채 한 번 접었다 피며 불렀을 판소리. 우리도 그 한복판으로 헤집고 들어가 신명 나게 놀아볼까요?
판소리의 등장
판소리는 ‘판’이라는 마당의 개념과 ‘소리’라는 노래의 의미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판소리는 민간신앙 무당의 소리로부터 나왔다, 광대로부터 기원이 되어 시작되었다 등 판소리의 기원은 학계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판소리는 어떻게 등장하게 된 걸까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 후기는 나라의 상태가 피폐해지고 양반의 몰락이 진행되는 무질서, 그야말로 혼란기였습니다. 불안한 이 시대에는 출처가 불분명하고 사회적 풍자가 더해진 이야기들이 민중을 뒤흔들었죠. 삽시간 장내를 빠르게 퍼져나간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음악이 결부되어 판소리라는 장르가 자연스럽게 발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음악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는데요. 바로 지배계층을 향한 신랄한 비판, 그리고 힘든 시대를 겪어내어야 했던 백성들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서양 오페라와 한국 판소리의 닮은 꼴 그리고 다른 꼴인데요. 서양에서 오페라의 기원을 약 16세기 후반으로 보듯이, 판소리의 등장 시점도 임진왜란 이후인 16세기 후반입니다. 그러나 귀족예술이었던 오페라와 달리, 판소리는 남녀노소 누구라 할 것 없이 전 계층을 통해 사랑받았습니다. 음악을 소비하는 계층에 확연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죠.

위의 그림은 ‘평안 감사 부임도’ 병풍 중에 한 폭이며 평양 대동강 능라도에서 펼쳐진 판소리 공연 장면을 묘사하여 그린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평민과 갓을 쓴 양반 이 한데 어울려 판소리를 관람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 그림에서 소리꾼은 마치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요. 노래와 더불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몇 가지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첫째,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한 몸짓인 발림, 두 번째, 이야기를 말로 풀어내는 아니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래. 이 세 가지의 요소와 함께 노래 부르는 사람에 맞춰 북으로 반주하는 고수(鼓手)가 필요합니다. 이 고수들은 판소리의 사설을 다 알고 있어야 하기에 진정 고수(高手)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관람하는 연극, 뮤지컬 그리고 오페라와 같이, 판소리도 귀중한 전통예술입니다. 우리의 고유한 문화인만큼, 한국인으로서 큰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습니다.
이처럼 판소리는 양반, 평민 등 계층 상관없이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음악이라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방중악(房中樂)이라 하여 자신의 집으로 예술인을 초청하여 음악을 즐기는 양반 문화가 있었음에도, 민간에서 먼저 유행한 판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를 통해, 판소리의 판이 깔리는 곳이 무대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양반 댁까지 깊숙하게 그 문화가 침투하게 되었는데요. 문화로 서로 다른 계층이 하나가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판소리 스타
지금과는 다르게, 조선시대의 음악인들은 신분제도라는 시대적 특성으로 인해 세습되는 천직 중 하나였습니다. 음악을 업으로 한다는 것은 조선시대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가 아니라는 점을 추리할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판소리를 한 인물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권삼득’은 ‘양반’이란 신분을 잃어버리면서까지 판소리 창자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판소리계의 ‘코어-팬(Core-fan)’이라 할 수 있죠. 집안 문중 사람들은 ‘양반이 되어가지고는 겨우’ 판소리를 하는 권삼득을 수치라며 때려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권삼득은 목숨을 유지한 채, 전국을 돌아다녀 판소리를 공부하고 대중 앞에 선보였습니다. 실제로 전라도 전주에는 ‘권삼득로’가 존재할 정도이니, 얼마만큼 판소리로 이름을 떨쳤을지 감이 오시나요? 그런 고난과 역경을 감내했던 권삼득은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판소리 ‘전기 8명창’ 중에서도 유명한 창자로 현재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
전기 8명창이 판소리로 대중을 한 데 모이게 했다면 후기 8명창은 본격적으로 판소리 판을 깔아줍니다. 요즘 ‘힙-’한 이날치 그룹의 그 ‘이날치’는 실제로 판소리 후기 8명창 중 한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날치 명창은 사실 판소리 주자로 처음부터 이름을 날린 것이 아닙니다. 줄타기를 하면서 ‘날치’처럼 재빠르게 줄을 탄다하여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이날치의 대표적인 특기는 동물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었다고 하는데요. 얼마나 기가 막히게 잘 불렀던지, <새타령>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하고 새의 울음을 소리로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실제로 새가 날아들었다는 일화까지 있다고 하네요?
판소리 5마당
우리는 학교에서 음악시간에 ‘판소리는 총 몇 마당으로 이루어졌는가?’와 같은 시험 문항에 대한 답을 고민한 경험이 있습니다. 답이 기억나시나요? 바로 5마당입니다. 즉, 지금까지 5개만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인 <흥부가>, 토끼와 자라 이야기인 <수궁가>, 중국 삼국지의 여러 대전 가운데 적벽대전이 모티브인 <적벽가>, 성춘향과 이도령 사랑 이야기를 다룬 <춘향가>, 아버지를 향한 효심을 다룬 <심청가>까지 총 다섯 가지 이야기만이 오늘까지 전래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12개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소리로 대중들에게 선보였던 판소리가 현재는 왜 5개만 남은 걸까요? 대중들이 잘 부르지 않았던 점이 가장 큰 첫 번째 특징이고, 일정 부분에선 외설적인 이유도 컸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변강쇠전>에서는 외설적인 장면까지 날 것 그대로 소리로 표현되어 대중에게 선보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이런 이야기는 유교적인 이유 및 그 외적인 상황들로 인해 다른 곡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지 못했을 겁니다. 그 결과, 지금의 우리는 <변강쇠 타령>을 통해 그 흔적만을 가늠하며 원형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의 이날치를 기대하며
후대에 넘어오면서 남아있는 5마당마저도 완창, 즉,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즐길 수 있는 무대와 공연들이 희소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한바탕 가운데 예술성이 뛰어난 혹은 인기 있는 대목들만이 중점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판소리의 감칠맛 나는 특징을 잘 보여주지 못합니다. 판소리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되는 서사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그룹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에서 맨 처음 범이 내려오는 장면뿐만 아니라, 범이 내려오기 전 그리고 그 후에도 토끼와 자라 사이에 벌어지는 쟁탈전의 흐름을 따라가 본다면 판소리의 진면목을 조금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판소리의 중요한 특징과 에피소드 중심으로 서술에 집중하다 보니 판의 크기가 다소 아쉽게 느껴지네요. 현재까지 ‘판소리 학회’는 판소리만을 연구해오고 있으며 많은 전통예술인들 또한 판소리의 명맥을 이어나가면서 또 다른 ‘이날치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판소리에 관심이 생기셨나요? 그렇다면 음악과 동시에 사설도 읽으며 보다 입체적으로 소리 감상을 해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혹시 아나요? ‘쇼미더 머니’ 시즌에서 <적벽가>를 만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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