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바로 노르웨이식 사랑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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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 ‘북유럽’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북유럽은 우리에게 지리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여전히 멀게만 느껴집니다. 유럽의 중심부에서 고작 두세 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지만 직접 그곳에 발도장을 찍어보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가구 디자인을 제외하면 그들의 문화에 대해선 알려진 바도 많지 않아요. 유럽 대륙의 독일이나 프랑스, 이탈리아가 문화 예술의 세계적인 흐름을 이끌었던 것에 비하면, 북유럽은 딱히 대중들에게 알려진 대표적인 예술인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인데요. ‘북유럽 스타일’의 클래식은 어떨까요? 노르웨이 스타일의 곡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노르웨이 출신의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를 소개합니다.
노르웨이의 색채를 담은 작곡가의 탄생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Grieg)는 1843년 6월 16일 노르웨이의 서남부에 위치한 아름다운 항구도시 베르겐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아버지는 성공한 상인이었고, 그는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함께 유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어요. 여섯 살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알아본 어머니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도 아래,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그는 1858년, 15세의 나이로 독일 라이프치히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나며 본격적으로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어요. 라이프치히이기는 그에게 음악적 역량을 넓힐 수 있었던 시기였는데요.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같은 고전 음악 작곡가들의 곡에 대해 배웠어요, 당시 독일에서 저명했던 슈만과 멘델스존 그리고 바그너의 낭만주의 작품을 공부할 수 있었죠. 이후, 그는 1861년 8월 18일 스웨덴의 칼스함(karlshamn)에서 처음으로 독주회를 한 후, 이듬해 베르겐으로 귀국해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서 정식으로 이름을 올렸어요.
그는 고향에 머물며 노르웨이만의 색채를 가진 음악을 작곡하길 원했지만, 당시 노르웨이는 문화 예술의 기반이 충분한 곳이 아니었어요. 그는 당시 북유럽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인지도가 높았던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이주해 자리를 잡았어요. 코펜하겐에서 그는 평생의 인연들을 만났어요. 그의 음악적 가치관에 큰 영향을 줄 친우들과, 훗날 그의 아내가 될 사촌 니나를 만난 것이죠.
코펜하겐에서의 인연

1864년, 그리그는 코펜하겐에서 노르웨이의 젊은 작곡가, 리카르드 노르드락(Rikard Nordraak)을 만났어요. 노르드락은 노르웨이의 국가를 작곡한 음악가예요. 당시, 노르웨이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요. 여느 노르웨이인들처럼 그리그와 노르드락 역시 자국의 독립을 기원했어요. 그들은 조국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음악을 함께 작곡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노르드락이 결핵에 걸려 2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어요. 하지만 그와의 만남은 그리그로 하여금 노르웨이의 민요와 수려한 자연 등에 눈뜨게 해주었고, 이를 클래식과 접목시키는 천재적인 아이디어와 영감 역시 선물해주었죠.
그리고 운명적인, 니나 하게루프(Nina Hagerup)와의 만남이 이뤄졌어요. 그녀는 베르겐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그리그와 가깝게 지내던 사촌지간이었어요. 여덟 살 때 가족과 함께 코펜하겐으로 이사했던 그녀는, 그리그가 코펜하겐에서 작곡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1863년부터 다시 교류하기 시작하며 서로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리그는 소프라노로 활동하던 니나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사랑했고, 그녀는 그의 뮤즈가 되었죠. 하지만, 사촌 지간의 혼인은 터부시 되었던 터라, 양가는 그들의 결혼에 냉랭한 반응이었어요. 그들은 비밀리에 혼사를 약속했죠.
그리고 1865년 봄, 공식적으로 약혼을 발표한 후, 그리그는 그의 사랑스러운 신부를 위하여 가곡을 작곡하였는데요. 그들의 친구인 동화작가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의 시에 노래를 입힌 것으로, ‘마음의 선율 op.5 (Melodies of the Heart, Op.5)’라는 이름으로 탄생했어요. 4개의 가곡으로 구성된 ‘마음의 선율 op.5’ 중, 세 번째 곡은 ‘그대를 사랑해’1)라는 곡인데요. 4분의 3박자 내림마장조(Eb Major)로 구성된 이 곡은 신부를 향한 그의 열렬한 사랑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로 표현했어요. 니나와 그리그는 이토록 굳건히 서로를 사랑했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그들의 결혼을 만류했고, 결국 어느 가족도 참석하지 않은 채 1867년 6월 결혼식이 치러졌어요.
1) 안데르센의 시, ‘그대를 사랑해’ 탄생 일화
젊은 시절 안데르센은 친구의 여동생인 리보르그 보이트(Riborg Voigt)를 짝사랑했어요. 리보르그 보이트는 약혼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짧은 편지로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요. 이후 1832년 안데르센은 그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담아 쓴 시들을 묶어 시집을 발매하였습니다. ‘그대를 사랑해’는 이 시집에 포함된 시중에 하나였고 훗날 친구 그리그의 손에서 가곡의 가사로 유명해졌습니다.
결혼 후 그들은 노르웨이 오슬로(Oslo)로 이주했어요. 1968년 4월 10일 그들에게는 딸 알렉산드라(Alexandra)가 태어났는데요. 딸의 탄생에 큰 기쁨을 느낀 그리그는 이에 영감을 받아, 같은 해 자신의 인생의 걸작인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 협주곡을 작곡했어요. 노르웨이 전통 민속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이 곡은 전 유럽에서 큰 호평을 받았고, 이후 세계적인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어요. 그리그는 이렇게, 민족의 정체성을 민족 고유의 민요나 전설, 역사 등의 소재를 음악에 풀어내 노르웨이의 민속 음악과 문화를 세계무대로 가져왔어요.

불현듯 이어진 고통, 그리고 고통의 승화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던가요. 일 년 후, 1869년에 그들의 딸 알렉산드라가 베르겐에 있던 가족을 방문하던 중 뇌막염으로 사망해버리고 맙니다. 이후로도 이들 부부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했어요. 1875년에는 그리그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고요. 더 이상 노르웨이에 적을 둘 이유가 없었던 그리그 부부는 유럽 전역을 떠돌며 생활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그 부부에게 이 시기는 우울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그리그는 좌절해야 했죠.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음악뿐이었어요. 그리그는 자신이 겪었던 슬픔과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켜 놀랍도록 아름다움 음악들을 작곡했어요. 니나는 성악가로서 그리고 그리그는 반주자로서 함께 공연하며 부부로서, 음악적 동반자로서 함께 시간을 이겨냈고요. 이 시기에 그가 니나를 위하여 작곡한 가곡, 그의 음악성을 집대성한 연가곡인 ‘Haugtussa, Op. 67’ 또한 아름다운 명곡으로 남아있죠.
그리그는 1907년 9월 4일 베르겐의 병원에서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그의 유골은 트롤하우젠(Troldhaugen)의 피요르드가 내려다보이는 동굴에 안치되었고요. 그리그의 사망 후, 니나는 거의 30년을 덴마크에서 살았고 1935년 90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어요. 트롤하우젠(Troldhaugen)에는 그들의 박물관이 세워졌으며 니나는 그리그의 무덤에 함께 안치되었습니다.
에드바르 그리그.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죠. 하지만 낯설기 때문에 그의 생애를 알아보는 설렘 또한 있을 거예요. 노르웨이 최초의 국민악파 작곡가였던 그리그는 독일 낭만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조국의 민요와 민속 춤곡의 요소를 도입하여 독자적인 예술을 창조한 작곡가였어요. 그가 남긴 명곡들과 함께 그는 여전히 국가적인 추앙을 받는 작곡가로 남아있는데요. 북유럽의 클래식. 그곳만의 진한 감성을 느껴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니나를 위한 헌정곡, ‘그대를 사랑해(Jeg elsker Dig!)’를 추천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베토벤의 작품, ‘그대를 사랑해(Ich liebe dich)’와는 다른 곡이니 원제목까지 꼭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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